[김초엽 _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_ 허블 _ 소설 _ SF 과학 소설]
고백할 것이 있다. 나는 각각의 단편으로 구성된 이 책을 읽는 내내 이 책이 하나의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고 착각했다. 그래서 중반을 넘어가면 각각의 이야기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의 인과관계가 하나 둘 밝혀질 것이라고 믿고 책을 읽어나갔다. 책을 읽어나갈수록 점점 등장인물들이 많아져서 나중에는 이름과 특징, 그리고 간단한 스토리를 적어놓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마지막장에 이르러서야 알게되었다. 모두가 각각의 이야기였다는 것을. 나는 왜 이런 선입견을 가지고 책을 읽기 시작했을까. (메모는 바로 버렸다.)
이야기해 둘 것이 있다. 이 책은 재미있다. SF물을 별로 즐기지 않는 나같은 독자도 이야기가 재미있는지는 없는지는 안다. ‘작가는 항상 독자들을 또 다른 세계로 안내해야 한다’라는 말을 들은 기억이 있다. 우리는 좋은 작품을 통해 또 다른 세계의 지도를 받아들고는 길을 나설 기회를 가지게 된다. 이 책은 그런 이야기에 잘 어울리는 책이다.
김초엽 작가는 우리를 새로운 세계로 안내함과 동시에 지금 우리가 발을 디디고 서 있는 곳들도 돌아볼 수 있게 해준다. 과학과 기술이 발전한 상상속의 이야기 안에서도 지금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들은 시원하게 해결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야기속의 환경은 낯설고, 사건들은 익숙하다. (익숙한 것들은 익숙한 것들이다. 불평등, 소외된 사람들, 차별, 소수자들, 뭐 그런것들. 이런 문제들이 익숙해지는 것은 위험한 일이지만, 요즘에는 책보다 현실에 더 비상식적인 사람들이 많이 눈에 띄어서 점점 더 이런 문제들에 무감각해지는 것 같아 걱정이다.)
새로운 별, 새로운 공간 그리고 우주 어딘가에 있을 새로운 생명체들을 만나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즐거운 일이다. 아래에 정리한 간단한 설명들은 책에 등장하는 다양한 공간과 인물에 대한 짧은 설명들이다. (아마 이정도만 읽는 것만으로도 책에 대해 궁금해질거라 생각한다.)
‘역사가 없는, 슬픔을 알지만 갈등과 고통, 불행은 상상의 개념인 마을’, ‘극단적인 분리주의에 빠진 지구’, ‘외계생명체와의 첫 접촉자’, ‘색상의 차이를 의미단위로 받아들이는 짧은 수명의 외계생명체’, ‘폐쇄된 우주정거장’, ‘감정을 파는 기업’, ‘책을 보는 곳이 아닌 추모를 위한 도서관’.
지금 이 시간에도 우주는 확장하고 있다. 우리는 아직 빛의 속도로 움직이진 못하지만, 의식을 조금만 확장하면 우리의 감각은 빛보다 빠르게 움직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 일상에 굴러다니는 평범한 물체를 통해서도 우주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분명 이 작가는 빛에 버금가는 속도로 자신의 이야기들을 지구의 생명체들을 향해 전송하고 있다.
[문장수집]
그 때 나는 알았어.
우리는 그곳에서 괴로울 거야.
하지만 그보다 많이 행복할 거야.
그들이 색을 인지하는 방식에 관해서도 알고 싶었다. 루이가 서로 다른 광원 아래에서 보이는 색들을 어떻게 같은 색으로 인지하는지, 의미 단위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색상 자체인지 혹은 인접한 색과의 차이인지, 그들의 ‘그림’에서 형태는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는지 아니면 특정한 역할을 수행하는지.
예전에는 헤어진다는 것이 이런 의미가 아니었어. 적어도 그때는 같은 하늘 아래 있었지. 같은 행성 위에서, 같은 대기를 공유했단 말일세.
하지만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조차 없다면, 같은 우주라는 개념이 무슨 의미가 있나?
우리는 점점 더 우주에 존재하는 외로움의 총합을 늘려갈 뿐인 게 아닌가.
아무리 가속하더라도, 빛이 속도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다. 한참을 가도 그녀가 가고자 했던 곳에는 닿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안나의 뒷모습은 자신의 목적지를 확신하는 것처럼 보였다.
소비가 항상 기쁨에 대한 가치를 지불하는 행위라는 생각은 이상합니다. 어떤 경우에 우리는 감정을 향유하는 가치를 지불하기도 해요. 이를테면, 한 편의 영화가 당신에게 늘 즐거움만을 주던가요? 공포, 외로움, 슬픔, 고독, 괴로움...... 그런 것들을 위해서도 우리는 기꺼이 댓가를 지불하죠.
우리가 소비를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이 오직 감정 그 자체였던가? 인간은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가 아닌가? 의미가 배제된 감정만을 소비하는 것은 인간을 단순히 물질에 속박된 동물로 전락시키는 일이 아닐까? 애초에 인간이 의미를 추구하는 행위조차도 궁극적으로 보다 고차원적인 행복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이지 않은가?
의미는 맥락속에서 부여된다. 하지만 때로 어떤 사람들에게는 의미가 담긴 눈물이 아니라 단지 눈물 그 자체가 필요한 것 같기도 하다.
어떤 문제들은 피할 수가 없어. 고체보다는 기체에 가깝지. 무정형의 공기 속에서 숨을 들이쉴 때마다 폐가 짓눌려.
아직 인간의 형상은커녕 제대로 된 신경체계조차 구축하지 못한 세포가 어떤 살아있는 인간보다도 강한 존재감을 지니는 샘이다.
연결을 끊어도 데이터는 어디선가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삶은 단절된 이후에도 여전히 삶일까.
김초엽의 소설은 읽는 사람을 울게 하고, 새로운 감각에 잠기게 하고, 나아가게 한다. 슬픔으로 가득찬 우주에서도 똑바로 날아갈 수 있을 거라는 용기를 준다. 지난 몇 년 동안, 기다리는 줄도 모르면서 김초엽을 기다려왔던 것만 같다. -소설가 정세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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