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광준 _ 심미안 수업 _ 지와인 _ 인문 _ 심리학 _ 교양심리]
공부는 끝이 없다. 세상은 계속 우리에게 말을 걸어온다. 그리고, 들으려 하는 사람에게만 수업해준다. 중요한 내용들은 대부분 진도가 매우 느린 과목들이어서 삶을 걷던 속도를 늦추고 가만히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수강하기 어렵다. 때로는 걷던 방향을 바꾸고 원래 가던 길을 벗어나 한 번도 가본 적 없던 골목으로 들어서기도 해야 한다.
작가의 말에 의하면 자연의 아름다움에 비해 인간의 흔적이 남은 예술은 더 강하게 각인된다. 그 이유는 인간이 가치를 부여했기 때문이고, 보는 사람은 그 가치를 다양하게 해석할 여지가 있으며, 위안을 주고, 그 다음의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만든 예술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나면 소유하고 싶은 갈망이 생긴다.
아름다움을 느낀다는 것은 결국 그 내용을 이해한다는 것이다. 예술을 향해 편견없이 적극적으로 다가갈 때 우리는 심미안을 키워나갈 수 있다. 미의 가치는 상대적인 비교를 통해 분명해진다. 그러므로 아름다움을 잘 느끼는 사람은 차이에 민감한 사람이다. 차이를 알아보는 능력이 커지면 우리는 본질의 의미를 이해하게 된다. 그 본질은 삶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본능으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더 좋고 더 의미있는 것들을 발견하려는 자연스러운 습관인 것이다.
미술관을 방문하는 것은 예술과 가까워지기 위한 좋은 접근방법이다. 미술관은 유명한 그림들을 가지고 있고, 감상할 수 있는 이상적인 공간을 제공한다. 미술관에 가서 그림을 보는 것은 우리의 예술에 대한 태도를 다르게 할 뿐만 아니라 익숙했던 대상마저도 새롭게 느낄 수 있게 한다. 다만 미술관 역시 스스로 우리에게 오지 않으며, 우리가 시간과 열정을 담아 다가가야 그 이상의 희열을 느낄 수 있다.
처음 보는 작품들은 모두 낯설다. 그리고 작품을 보고 좋다고 못 느껴도 괜찮다. 빨리 이해하려 하지 말고 충분히, 천천히, 선입견과 편견에서 벗어나 작품을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게 접근하는 과정에서, 긴 세월을 뛰어넘어 현재에 이른 명작들은 좋은 안내자가 되어준다. 사람들이 어려워하는 추상화나 동양화도 작가의 의도를 가늠해보거나, 시대의 맥락과 상징을 알아보거나, 또는 형태보다 질감과 색채 등 다른 감상할 포인트를 찾아보는 시도를 통해 독해를 시도해 볼 수 있다.
또한 전시를 즐기는 방법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꼼꼼히 볼 수 밖에 없게 되는 유료전시를 보러 가기도 하고, 취향과 주파수가 잘 맞는 같이 갈 사람을 선택하거나, 집중하고 싶을 때에는 혼자 관람하고, 시간의 여유를 가지고 전시관이 한산한 틈을 타 방문하는 것이 좋으며, 미리 전시회의 정보를 챙겨보고, 가능하면 마련해놓은 설명문과 동선을 이용해서 전시의 맥락을 파악하고, 작품의 사진을 찍어서 자꾸 들여다볼 것 등이다. 이렇게 미술감상을 통해 아름다움을 느끼게 되면 느끼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행동이 일어나며 생각이 바뀌게 된다.
또 하나의 예술인 음악은 직감적이다. 음악을 듣게 되면 우리의 몸이 먼저 반응한다. 음악의 가장 큰 특징은 시간의 질서에 강하게 좌우되는 것이다. 그런 시간 속에 갇히는 경험을 즐겨야 음악을 좋아하게 된다. 또 음악의 특별한 점은 그것이 ‘사라지는 예술’이라는 것이다. 음악도 미술과 마찬가지로 좋은 공간에서 생생하게 마주했을 때, 좀 더 친숙하게 느끼고 가깝게 접근할 기회가 주어진다. 우리들이 보통 지겹거나 고리타분하다고 느끼는 국악도 현장에서 접하면 다르다.
수백년동안 이어온 클래식의 생명력은 꾸준한 해석에 있다. 끊임없이 재연됨으로써 살아있는 음악은 클래식 뿐 아니라 재즈나 팝과 가요도 마찬가지다. 음악도 체험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사람이 분야에 대한 깊이를 갖게 된다. 특별히 예민한 귀를 가지지 않아도 반복과 비교를 통해 숨겨진 음을 듣는 감상능력을 키워갈 수 있다. 그리고 항상 새로운 음악을 듣고 관심의 지평을 늘리면 재미와 함께 자신만의 세계를 넓혀갈 수 있다.
사람이 공들여 만든 것들은 경외심을 가지게 한다. 건축의 아름다움은 우리가 가진 감정들을 극대화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건축은 그 크기를 통한 압도감과 세월을 거스르는 영속성을 통해 인간의 감정을 극대화한다. 하지만 단순히 크기만으로 아름다운 건축물로 평가받기는 어렵다. 비례와 균형 역시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다. 건축은 안과 밖, 공간과 사물의 조화를 추구하며 세상에 질서를 부여하는 종합예술이다.
어떤 분야나 마찬가지로 건축의 완성도 역시 디테일에 달려있다. 쉽게 눈에 띄지 않는 곳까지 공을 들이고, 건물 자체 뿐 아니라 주변환경까지도 고려한 건축물만이 아름다움을 드러낼 수 있다. 그래서 건축에 관심을 갖게 되면 주변과 사물들에 대해 탐색하는 범위가 넓어지게 된다.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고, 관계없어 보이는 것들의 맥락이 잡힌다. 건축이라는 영역 안에서 예술과 기술이 만나고, 과거와 현대가 뒤섞인다. 그 흔적들을 보는 재미가 건축을 하나의 예술로써 즐기는 일이다. 건축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민감해지는 것은 자신이 놓여 있는 조건과 맥락에 관심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자신과 함께 하는 사람들에 대한,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와 사회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분야가 바로 건축이다.
남들이 보지 않는 것을 보고, 본 것을 다르게 찍은 것을 특별하게 보여주는 일이 사진이다. 사진은 접근이 쉬운만큼 갈증이 크고 차별화도 어렵다. 새로운 형식이나 구도를 보여주는 것은 상대적으로 쉬운일이지만 보는 사람에게 남다른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사진을 찍을 때에도 비교의 관점은 중요하다. 가진 것이 별로 없으면 좋고 나쁨을 구분하기 힘들다. 이럴 때 앞서간 작가들의 작품은 좋은 참고자료가 된다. 그 이후에는 얼마나 ‘다르게’를 찾아가는 것이다.
사진은 기록의 예술이다. 사진은 시간을 가두는 예술이다. 흔적은 시간에 맞서는 유일한 대응이다. 사진은 시간의 운명에 맞서, 그 모습을 남겨두는 것으로 위안을 주는 예술이다. 그런 가두어진 시간 속으로 들어가서, 사진기 밖에 있었던 것들을 상상해 보는 것, 그리하여 그 이미지가 붙들어놓은 시공간과 마주하는 것, 그것이 사진의 미학을 대하는 태도이다. 사진은 우연처럼 보이지만 치밀한 계산의 산물이며, 지루한 반복과 연마를 통해서만 감동을 주는 사진을 찍을 수 있다. 사진은 세상의 숨겨진 진실과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일이다. 모든 위대한 사진들은 항상 이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무엇을 보고 싶어하는 사람인가.’그 질문을 듣기 위해 사진전에 가고, 답을 찾기 위해 사진기를 든다. 정답이 없다는 것만이 위안이다.
그야말로 디자인의 시대, 디자인은 ‘사물의 진화’이며, ‘일상의 의미화’이다. 원시적인 도구인 타제석기에서도 우리는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하나의 사물에는 인류의 역사가 담겨 있다. 우리가 오래 쓰는 물건에는 오래된 미적 감각이 녹아 있다. 새로운 디자인 시도는 결국 사물의 본질을 향한다. 새로운 것이라도 본질을 망가뜨리면 실패한다. 또한 사람들이 좋은 디자인이라고 받아들이는 또 다른 요인은 정교함과 완성도이다. 이런 종류의 미감은 사진이 없던 시절 완벽한 재현에 성공한 미술품에 감탄하던 감각과 같은 것이다. 완벽하지 않은 인간이 완벽한 창조물을 만들어낸 것에 대한 대리만족 같은 것이다.
사진과 미술, 음악과 마찬가지로 디자인도 교감되지 않으면 일방적 신호에 머무른다. 물론 모든 기호를 만족시키는 방법은 없다. 사진도, 미술도, 음악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과 감각을 교감해야 한다는 목표를 갖는 건 중요하다. 좋은 디자인은 공감의 폭이 넓다. 바꾸어 말하면 공감능력이 좋은 사람이 디자인 감각도 좋다. 공감능력이 좋다는 건 그만큼 개방적이고 유연한 사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자신만의 관점에 머물지 않고 다수의 관심이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다수의 관심은 한 영역에 머무르지 않는다. 현대미술과 디자인은 같은 맥락으로 이어져 있다. 디자인과 관련된 전시를 찾아보는데 익숙해지면, 다양한 예술형태를 이해하고 좋아하게 된다. 세상의 모든 일은 연관되어 있고, 고립되면 관계의 맥락을 놓치게 된다.
책의 내용 정리는 여기까지다.
불안을 극복한 인류의 이야기로 가득한 곳이 미술관이며, 불안한 사회일수록 다양한 문화적 경험과 예술적 경험이 탈출구라고, 문화심리학자 김정운 교수님이 쓴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이 책의 대상은 창조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에 한정된 것이 아니다. 나의 미술관 방문은 과천에 있는 국립현대미술관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니까 그건 고등학교 시절이었는데, 그야말로 불안함의 연속인 때였던 것 같다. (물론, 불안함이라는 근본적인 감정은 몇십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벗어나기 힘들다.) 미술관을 찾은 것은 아니고, 과천에 있는 동물원을 좋아했는데 동물원 옆에 미술관이 있었다. 미술관 옆 동물원은 내가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나이다. 앞뒤가 바뀌어도 좋을 것 같다. 처음에는 뭐가 뭔지 모르고 그림을 보러 다녔는데, 언젠가부터 그 곳을 방문하면 마음과 머리가 새롭게 정돈되는 느낌을 받는다. 그래서 지금도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으면 나는 종종 과천에 간다. 그리고 그 뒤로 찾은 다른 여러 전시관들과 함께 과천이라는 장소는 내 생활의 중요한 맥락을 구성한다. 그것들은 자연스럽게 확장되었고 확장되고 있다. 창조적인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주변을 창조에 도움이 되는 것들로 채워야 한다고 믿는다. 전시관을 가고, 작품을 보고, 공연을 보고, 음악을 듣고, 책을 읽어야 한다. 주파수가 맞는 좋은 사람들과 함께라면 더욱 좋을 가능성이 많아진다. 작가의 이야기처럼 아름다운 것들의 가치를 알아보려면 비교해보고 차이를 느껴야 한다. 어디에서 들은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가장 무서운 사람에 대한 정의를 들은 적이 있다. 가장 무서운 사람은 책을 많이 읽은 사람도, 적게 읽은 사람도 아닌, 단 한권만 읽은 사람이라는 이야기였다. 다양하게 접해봐야 비교가 가능하고, 또 즐길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완벽하게 마음에 든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마음에 드는 부분이 있긴 하지만, 보관하고 종종 꺼내어 들춰보고 싶은 책은 아니다. 이유도 지점도 잘 모르겠지만, 작가의 주장이 서로 상충하거나 대립하는 부분들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느껴지는 부분들은 중간중간 책을 읽는 것을 멈추게 만들었다. 이런 멈춤은 행간에서 머무르며 그 사이에서 느껴지는 잡음들을 즐기려 멈추는 것과는 다르다.
[문장수집]
추상미술은 형태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이다. 음악은 외우는 것이 아니라 잊어서 다시 찾게 되는 것이다. 좋은 공간이란 겉에서 보기에 좋은 게 아니라 자신의 존재감이 달라지는 곳이다.
우리는 감탄하려고 산다. 돈으로 살 수 없는 삶의 깊이는 정말로 좋아하는 것, 참으로 아름다운 것의 감탄으로 가능해진다. 김정운 교수.
오감을 통해서만 우리는 세상을 읽을 수 있다. 그래서 좋은 감각은 우리에게 좋은 세상을 선물한다. 유현준 건축가.
좋은 감각은 타고 나는게 아니라 많이 경험하고 훈련하는 것이다. 자기의 감각에 자극을 주는 일을 계속 하면, 자신도 모르던 가능성을 발견하게 된다. 손흥주 사진작가.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렸다는 ‘일체유심조’가 감각의 세계에도 적용되는 듯했다. 말은 글이 주는 행간의 느낌을 미처 옮기지 못하고, 보는 것은 듣는 것을, 듣는 것은 접촉하는 것을 이기지 못하는, 그 갈증과 만족 사이를 마구 오가는 시간이었다.
그렇게 살다보니 알게 되었다. 삶의 여유가 있을 때 무엇인가를 즐기는 것보다, 삶이 고단할 때 마주한 아름다움이야말로 더 소중하고 오래간다는 사실을 말이다.
인간의 흔적이 남은 아름다움은 다르다. 자연의 아름다움과 인간의 손이 닿은 결과물의 아름다움은 차이가 있다. 우선 기억이 오래 간다. 다른 감정에도 영향을 미친다. 감동의 정체를 알게 되면 인간이 최종적으로 추구하게 될 욕망이 ‘예술에 대한 욕망’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게 된다.
왜 이런 아름다움은 더 강하게 각인되는 걸까. 인간이 ‘가치’를 부여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냥 보기 좋은 것, 신기한 것이 아니라 숨겨진 의도가 있고, 준비된 내용이 있기 때문이다. 그 내용을 유형과 무형의 형태로 구현하고자 한 노력이 있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감상자의 맥락에 따라 그 ‘가치’가 매우 다양한 해석으로 번지기 때문이다. 감상자가 어떤 개인적인 기억을 가지고 있느냐, 어떤 맥락과 배경에서 그 예술을 마주했느냐에 따라서 의미가 증폭되고 새로워진다.
아다치는 일반에게 정원을 공개하면 훼손될 위험이 있으므로 주변에 회랑을 둘렀다. 그리하여 관람객들이 밖에서 정원을 바라보게 했다. 사진의 프레임마냥 사각의 창으로 잘려진 정원을 보는 관람객은 만든 이가 의도한 대로 반응하고 느끼게 된다. 마음껏 펼쳐진 공간에서는 오히려 스쳐버리기 쉬운 아름다움의 핵심을 완성된 형태로 보여주려는 의도이다.
아다치의 미술관처럼 극진한 아름다움은 무소불위의 권력 같아서 사람들을 굴복시키는 힘이 있다. 그래서 아름다움의 구체적 실현인 예술품을 보고 미의 권능을 인정하게 되면, 뒤이어 미술관, 음악홀, 거장의 건축물로 발길이 옮겨진다.
많은 예술품들이 숱하게 볼 수 있는 사물이나 풍경을 다룬다. 느끼려고 마음을 연 사람에게만 익숙함 속에 숨어 있는 새로운 감흥의 세계를 보여준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조화와 통일성을 추구한다. 어떤 일이라도 정성을 들이면 그런 경향이 더 강해진다.
그림의 뒤에는 누군가의 내면이 있다. 묘하게 끌리는 사람과 마주한 느낌을 갖는 것이야말로 그림을 감상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아름다움은 세월을 이기는 힘이다. 오늘 거절당했어도, 내일 반겨질 수 있는 가능성이다. 사람들이 시대와 불화했던 예술가들에게 더욱 애틋한 마음을 갖는 이유이다.
현대의 미술은 재현보다 의도가 더 중요하다. 추상미술은 형태를 파악하려는 노력을 버리고, 작가의 의도에 주파수를 맞추려 할 때 진정으로 다가온다.
취향이 단단해질수록 삶은 구체성을 띈다. 그것이야말로 행복의 디테일을 채우는 방법이다. 그들이 지나온 인생은 매우 풍부했을 것이다. 삶의 공간마다 시간의 에술로 채워왔을 것이다.
예술만큼 창의적 시도와 노력을 집약하는 분야는 없다. 예술은 구체적 용도가 없다. 용도를 지니는 순간 상품이 되어야 한다는 괴로움에 시달린다. 상품은 팔리지 않으면 실패를 인정해야 한다. 거꾸로 예술품은 반드시 팔린다는 보장이 없다. 팔리지 않아도 실패라 하지 않는게 예술의 불문율이다. 자유롭게 무슨 짓을 해도 용서도는 인간 세계의 유일한 일탈통로가 예술인 것이다. 그런 만큼 새로움만이 최고의 선으로 인정받는게 예술이다. 비록 외면받는다고 해도 예술가의 작업은 도발적이어야 한다.
취향은 어떤 특정한 대상, 분야, 종목을 선택하는 일이 아니라, 비슷한 것 사이의 차이를 얼마나 촘촘하게 설명할 수 있는 지의 여부가 된다. 미적 감각은 아름다운 것과 아름답지 않은 것을 구분하는게 아니라, 더 나은 아름다움을 선택하고 골라내는 능력이다.
디자인의 뿌리는 어쨌든 미술이다. 미술만이 아니라 다른 예술에도 관심을 가지는 게 좋다. 인류의 미적 역사를 이해하는 경험을 자꾸 해야, 오늘 내가 하는 일에 대한 두려움도 사라지고, 새로운 아이디어도 샘솟는다. 특히 현대처럼 ‘하늘 아래 새로운 일이 없을 것 같은’ 두려움에 시달리는 시대에는 더욱 그렇다. 맥락을 알아야 모방을 해도 창조적으로 할 수 있고, 나는 새롭다고 생각하는데 다른 이들은 식상하다고 느끼는 함정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일상의 물건에서 디자인을 중요시하게 되는 이유가 또 하나 있다. 물건은 사실 이용되는 시간보다 그냥 놓여 있는 시간이 더 많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대부분의 사물은 본래의 기능대로 사용될 때보다, 바라보고 마주쳐야 하는 시간이 더 많다. 그렇다면 보아서 아름다운 측면이 매우 중요해지는 것이다.
자신이 가진 작은 욕망들을 잘 수용하면 필요 이상으로 강해지지 않는다. 욕망은 다듬고 억압하는 게 아니라 꺼내어 해소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별거 아닌 욕망이 결핍이 되어버리고, 필요 이상의 에너지를 쓰게 된다. 일상에서 적절하게 자신의 욕망을 만족시켜주어야 정말 좋은 것, 정말 필요한 것에 집중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그래야 좋은 취향과 좋은 삶이 형성된다.
좋아하는 일은 외압을 걷어낸 스스로의 선택이어야 의미가 있다. 좋다는 건 무엇일까. 아리스토텔레스의 지혜를 빌리면 이렇다. 그는 재미있어야 하고, 의미를 더해 감동이 넘치며, 누구에게나 쓸모 있는 것이 좋다고 했다. 인류의 스승이 말하는 ‘좋음’이란 어렵지 않다. 예술의 일상화란 거창하게 말하지 안하도 된다. 매일 먹는 끼니의 그릇을 더 아름다운 것을 놓고, 들리는 음악을 스스로의 선택으로 채우는 것이다. 어떤 것이든 좋으나, 그것이 아니면 안 된다는 선별의 기준을 갖게 되면, 그것이 곧 심미안이다.
아름다움을 파악하고 경험하게 되면, 스스로의 인식과 판단의 범위가 다음 단계로 올라서게 된다. 무용한 것이 유용한 가치로 바뀌는 행복의 선순환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런 순환의 시간들을 갖게 되면, 삶이 지루할 틈도 괴로울 틈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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