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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혜영 [비밀정원] 책 리뷰

by ianw 2024. 9.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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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혜영 _ 비밀정원 _ 다산북스 _ 소설 _ 한국소설 _ 혼불문학상]

 

 

 

누군가에게 오늘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평범한 하루들 중 하나일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는 태어나고, 누군가는 세상을 떠나고, 누군가는 살아가기 위해 발버둥 쳤고, 누군가는 스스로 삶을 마감했으며, 마음을 바쳐 사랑하고, 떠나고, 또 돌아오는 날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선택은 각자에게 주어진 스스로의 몫일 테지만, 때때로 삶은 우리를 우리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위험한 모서리 끝까지 몰아붙이기도 한다.

 

비밀 정원 책

 

오랜 시간 비웠던 고향집으로 주인공이 돌아오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주인공 이요는 어린 시절을 이 공간에서 보냈고, 그 곳에는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기억들이 묻어있다. 할머니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집으로 돌아온 율이 삼촌과 주인공은 함께 시간을 보내며 가까워진다. 심촌이 떠난 후 요는 테레사 라는 한 소녀를 만나고 그 소녀의 출생의 비밀도 함께 담겨있는 동화 같은 이야기들이 섞인 편지를 받게 된다. 방학을 맞아 삼촌은 친구인 손상기 교수와 함께 집으로 돌아오고, 주인공 요는 우연히 듣게 된 삼촌과 손교수의 대화 속에서 삼촌의 마음속에 있는 사람이 어머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소녀의 비밀스러운 편지는 계속 이어지고 요는 학교에 가서 재호와 현석이라는 새로운 친구들과 학교 내 비밀자치회의 수장인 김경수를 만나게 된다. 요는 다시 들른 집에서 사랑의 도피를 원하는 삼촌과 어머니의 대화를 듣게 되지만 삼촌은 떠나고 어머니는 집에 남는다. 대학에 들어간 요는 고교동창 현석을 통해 오월 광주의 학살극을 마주하게 되고 정권을 풍자한 시를 학보에 은밀하게 싣게 된다. 그 때 율이 삼촌이 생을 마감했다는 비보가 들려오고, 장례를 마친 집에서 삼촌과 어머니의 비극적인 사랑이야기를 듣게 된다. 이후 인적이 끊긴 집으로 경찰의 수배를 받고 있는 학생이 숨어들어오는데 그는 학창시절에 선배로 만났던 김경수 였다. 삼촌의 죽음 후 어머니는 점점 쇠약해져 생을 마감하고, 삼촌의 옆에 묻힌다. 요는 손교수의 추천으로 미국으로 떠나고, 세월이 흘러 돌아온 고향에서 삼촌과 어머니의 딸이었고, 김경수의 아내였던 테레사와 그의 아들을 만난다.

 

비밀 정원 책

 

어린 시절, 비록 시대와 모습은 조금 달랐지만 우리는 마치 세상의 주인공처럼, 혹은 책 속의 주인공처럼 집 근처의 길을 걸었고, 길가의 풀들을 장난감 삼아 놀곤 했다. 동네에서 만난 아이들과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어울리다 보면 금세 저녁시간이 되었고, 금세 계절이 바뀌었다. 작가의 글들은 나를 순식간에 그 곳으로 데려다 준다. 지금은 생경하지만 그 때엔 어딜 가나 볼 수 있었던 풍경들, 그 풍경들에 대한 작가의 묘사는 정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시적이어서 오히려 기억보다 생생하고 아름답다. 그래서 그립다.

 

비밀 정원 책

 

어린 나이에는 그저 세상이 아름답고 편안하게 보일 뿐이었다. 어린 아이에게 시대의 상처는 그리 중요하게 생각되는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자연이, 세상이 주는 아름다움과 미지의 세계에 대한 신비함이 자연스럽게 시가 되어 가슴을 두드리는 나이. 원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시대의 아픔들로부터 피해있을 수 있는 나이. 하지만 주위의 사람들이 피할 수 없기 때문에 결국 아이도 피할 수 없다.

 

비밀 정원 책

 

소녀의 손을 빌려 쓴 동화들도 나를 다른 곳으로 데려다주기는 마찬가지였다. 추억과는 조금 다른 곳, 어린 시절 동화에서 읽었던 추억 조금, 읽고 있는 아이의 모습이 떠올려지는 모습 조금, 그리고 아마도 그 아이가 그 날 밤 꾸었던 꿈 조금을 섞어 만든 예쁜 보따리 같았다. 이렇게 예쁘게 포장된 이야기들은 주인공의 주변 사람들이 겪는 이야기와 대비된다.

 

그래서 어쩌면 이 책에서만은, 이 이야기 속에서만은 가장 운이 좋은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주인공 이었다. 유복한 가정환경에서 자라 틀에 박히지 않은 교육을 받았고, 자연스럽게 지식인의 모습으로 자라는 주인공의 인생은 주변사람들의 치열하거나 처절한 삶들과 대조를 이룬다. 그리고 주변사람들과는 달리 운 좋게도 용케 위기들을 잘 피해나간다. 그래서 나에게 마치 주인공은, 이 큰 굴곡 없는 삶을 살아온 주인공은 시간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별로 자라지 않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비밀 정원 책

 

책 표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잃어버린 엄마의 첫사랑을 찾아서라고, 주인공은 엄마의 첫사랑을 찾아 다니지 않는다. 이루어지지 않아 더 슬프고 애절한 사랑의 흔적이 주인공을 찾을 뿐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가는 동안 시대를 슬프게 만들었던 사건들이 주인공을 스치고 지나갈 뿐이다. 우리에겐 오히려 선명하지 않아서, 시간의 힘에 의해 바랜 색이어서 더 아름답고 좋은 기억들이 있다. 그 기억들을 생성했던 자리와 흔적은 돌아갈 수 없는 시간에 대비되어 더 그립고 아련하다.

 

비밀 정원 책

 

책을 덮으며 조금 아쉬웠던 점은 시대의 흐름을 이루었던 큰 사건들과 개인들의 서사가 잘 어우러지지 않는 느낌이었다는 것이었다. 한 쪽에 힘을 실어야 했다면 당연히 개인들에 대한 부분일 수 밖에 없었겠지만, 혹시 대작으로 취급받거나 큰 대회에서 수상하려면 그런 요소들, 시대의 아픔을 함께 해야하는 것과 같은 느낌들이 필수적으로 있어야 하는 걸까 하는 생각도 뒤를 이었다.

 

어쨌든 지나간 것들, 지나간 사람들은 우리가 사는, 살아가는 이유가 되기 때문에 더욱 소중하다. 그리고 그 만큼이나 우리가 살아내야 하는 일상의 힘은 너무나 강력해서,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사람이건, 나의 일상에 한 사람의 일상이 포개어지고, 그리고 또 다른 사람의 일상이 포개어지다보면 아래 깔린 누군가의 절박함은 쉽게 잊혀지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거침없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납작해져서 보이지 않게 되어버리기 십상이다.

 

비밀 정원 책

 

갑자기 뭔가 일이 일어나 격한 감정들이 휘몰아치는 날, 그 이유가 기쁨이든 슬픔이든 관계없이, 그렇게 우리를 세게 치고 지나가는 날 보다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는 날이 오히려 반갑고 고마운 날이라는 생각이 드는 요즈음이다. 그래서, 뭔가를 타고 갈 수 있는 곳이 아닌, 눈을 감으면 갈 수 있는 곳으로 우리를 안내해주신 작가에게 고마운 마음이 든다. 이렇게 순식간에 휙 하고 데려갔다가 어느새 다시 돌아오게 만드는 재주가 있으신 분, 작가의 다음 작품이 기대되는 이유다.

 

 

 

 

 

[문장수집]

 

어머니와 함께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간 것 같은 행복감에 목이 메어았다. 나는 소년이고 세상은 다듬이질한 이불깃처럼 정돈되어 있었다. 내일 아침과 미래는 문 밖에서 약간 허리를 굽히며 나를 맞이할 것 같았다. / 8p

 

꿈나라엔 어떻게 가나요? 그저 두 눈을 감으면 도착한단다 얘야. / 26p

 

빗방울이 먼저 지붕을 노크하더니 삽시간에 무수한 동료를 이끌고 앞 들판으로 쏟아져 내렸다. 빗물은 낮은 곳으로 모여 어깨동무를 하고는 왁자지껄하게 앞개울로 행진해나갔다. / 33p

 

가을걷이를 끝낸 들판에서 이삭을 줍는 새들은 제 무게를 가늠해볼 양으로 한 번씩 날아올랐다가 내려앉고는 했다. / 36p

 

집 안이 편지봉투의 색동깃 색으로 온통 물들었다. / 36p

 

별들은 검은 양탄자를 밟고 와 제 이름의 금빛 의자를 찾아 앉았다. 달은 지상의 만물이 꿈을 꾸도록 은빛 이불을 덮어 주었다. / 39p

 

등불 아래의 동그란 시간은 겨울밤에는 길고 여름밤에는 짧다. / 47p

 

그가 눈을 가늘게 뜨는 것은 현실과 상상 사이의 강폭을 좁혀서 쉽게 건너뛸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 48p

 

숫자와 언어는 인류의 정신을 확장시키는 도구이지. / 50p

 

목화 솜뭉치 같은 눈송이가 끊임없이 내려앉더니 두터운 솜이불이 되어 땅을 덮었다. / 50p

 

별들은 특별한 밤을 위해 반짝이는 구두를 신고 등장하고 있었다. / 55p

 

이 밤의 등불을 기억하리라. 마음에 별이 졌을 때. / 56p

 

하루가 저무는 성당의 지붕 위에는 노란 별들이 하나둘씩 내려와 앉는군요. 내가 잠들어 있는 동안 가끔 발을 헛디딘 별 하나가 내 방 창문으로 굴러들어오기도 한답니다. / 82p

 

그 기억은 양지쪽에서 하얀 토끼로 살고 있습니다. 마음이 울적할 때마나 나는 그 토끼에게로 달려가 토끼풀을 한 줌씩 집어줍니다. 토끼는 앞발로 오물거리며 먹이를 재빨리 먹어치우지요. 내가 자라면 그 흰 토끼가 쇠약해지고 마침내 죽어버릴까 걱정입니다. / 83p

 

말에 날개가 생기도록 우리는 조용히 기다려주어야 합니다. 어떤 말이든 생각을 하면서 기다리면 그 겨드랑이에 날개가 돋아나요. / 86p

 

창문은 평소에는 병정처럼 사각 진 어깨를 곧추세우고 서 있다가 햇솜 같은 햇빛과 날생선 같은 달빛을 방 안으로 나르는 일을 합니다. / 92p

 

요정들은 천사들이 미처 돌보지 못하는 작지만 중요한 일을 합니다. 꿀벌들의 어깨에서 꽃가루를 털어내 자존심을 세워주고 나뭇잎을 들춰서 골고루 햇볕을 받게 하고 애벌레 등이 다치지 않도록 풀잎 위의 이슬을 잘게 부숴놓지요 한밤중에 알을 낳는 어미벌레를 돕기 우해 반딧불을 앞세우고 벌레집을 방문하기도 합니다. / 113p

 

햇빛이 쨍쨍한 날 비눗물을 만들어서 입으로 불어보아요. 비눗방울이 빛 속으로 날아갈 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방울을 밀어올리는 요정들이 무지개 색 날개가 보인답니다. / 116p

 

저는 좋은 시는 무조건 외워서 낭송합니다. 시를 연주하는 것이지요. 시는 노래해야 합니다. 노래가 시입니다. 인쇄된 시는 연주용 악보에 불과하지요. / 141p

 

집은 언제나 돌아오라고 하네. 음식이 식기 전에 우리는 돌아오리라. / 143p

 

손님은 초고가 시의 출발이며 가장 중요한 원재료라고 나에게 강조했다. 그는살아있는 물고기를 먼저 잡아들여라. 요리는 퇴고에서 하면 된다고 누누이 말했다. / 145p

 

이런 규칙적인 생활은 일정한 크기로 잘라진 슬라이스 식빵과 같지요. 천국은 아마도 마음대로 뜯어먹을 수 있는 덩어리 빵일 것입니다. / 197p

 

기다렸다. 그것 외에 달리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어쨌거나 그 어떤 시점이 지나면 나는 남겨질 것이었다. 홀로......혹은 함께. / 261p

 

지나가고, 지나가니, 모든 게 지나가는구나. 그러나 나는 자주 뒤돌아보리라. -아폴리네르의 시집 알코올 중에서- / 313p

 

당신과 함께 있는 아침에는 서두르지 않는다. / 32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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