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인생이라 부르는 것들 _ 정재찬 _ 인플루엔셜 _ 인문 _ 문학이론 _ 비평 _ 평론]
자기 삶의 언어를 찾는 열네 번의 시 강의
나는 책을 읽으며 인상적인 문장들을 수집한다. 독서대(최근에 장만했는데 정말 책을 읽는 시간의 질이 높아지는 물건이다.)에 책을 올려놓고 그 밑에 블루투스 키보드를 놓는다. 아이패드는 거치대에 올려 책 옆에 따로 둔다. 그리고 키보드 아래에 손을 가지런히 두고 책을 읽어나가다가 좋은 글귀가 보이면 키보드에 손을 올려놓고 타이핑을 하기 시작한다. 재미있게도 타이핑을 하는 속도는 문장의 느낌에 따라 달라진다. 시가 나오거나 감성적인 부분을 자극하는 문장을 타이핑할 때에는 상대적으로 속도가 느려지고 자판을 두드리는 소리도 작아진다.
정재찬 작가님은 한양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님으로 재직 중이며 방송에서도 시의 힘과 아름다움을 전파하는 모습으로 익숙한 분이다. 이 책은 사실 방송에서 강의하는 작가님의 모습을 그대로 글로 옮겨온 느낌이다. 이야기를 이어나가시다가, 중간에 갑자기 관련된 시를 읽어주신다. 그리고는 또 이야기를 해 주신다. 그 내용은 주로 우리가 살면서 마주치는 것들, 자칫 방심하면 그냥 방치하거나 마치 원래 없었던 것처럼 지나쳐버리기도 하는 소중한 것들, 그리고 가능하면 피하고 싶지만 살다 보면 마주칠 수 밖에 없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작가님은 여기저기 흩어져 있지만 실은 잘 살아가기 위해 챙기고 모아야 할 것들을 하나하나 주워서 차곡차곡 정돈한 다음 우리에게 건네주신다.
나는 사실 많은 아름다운 것들의 의미를 인간 스스로가 퇴색시키고 있다고 생각하며 산다. 그들은 분명 소수일 수 있지만 그들이 아름다운 것들을 망가뜨리는 형태는 너무나 자극적이어서 훨씬 더 빠르고 강력하게 사람들에게 전달된다. 오늘도 뉴스에서는 ‘어머니’라는 가장 아름다운 단어가 망가지고, 공공의 안녕을 위협하는 종교인들의 소식이 들린다. 그런 답답한 이야기들을 접하다 보면 좋지 않은 감정들이 올라오고 안에 쌓이기 시작한다. 이 책은 그럴 때에 다시 꺼내어 읽으면 좋을 것 같다
작가님은 우리 마음의 지하실에 가끔은 신선한 공기를 불어넣어줘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냄새가 흘러나갈 수 있게 환기를 해야 한다는 것. 여기서 냄새란 우리 마음속의 슬픔과 불안, 우울 같은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들일 수 있다. 슬퍼하지 않을래,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돼, 난 나약한 사람이 아니야, 같은 이야기들은 오히려 부정적인 것들을 마주보는 게 아니라 피하려는 거라고 한다. 그런 것이 더 위험하다고, 슬픔과 우울함이 흘러나갈 수 있게 길을 터 주어야 한다고 이야기해 주신다.
길 이야기가 나온 김에, 여행갈 때 막상 가져갈 책을 고르는 게 쉽지 않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혹시 나 같은 분이 있다면 이 책을 추천해드리고 싶다. 꼭 다 읽고 오지 않아도, 마음에 드는 일부의 주제만 골라 읽어도 사유의 소재들이 넉넉히 생기기 때문이다. 끝까지 읽지 않아도 죄책감이 생기지 않을 것 같다. 거기에다 감상하기 좋은 시들도 계속 등장하기 때문에 여행과 함께 하기에 좋은 책이 될 것 같다.
최근 들어 시작된 슬럼프가 결국에는 욕심 때문이었음을 또 알았다. 책 덕분이었다. 저번에도 그랬었는데 말이다. 역시 다독多讀은 필요하다. 스스로를 너무 다그치지 말고 다독일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글을 읽는 여러분도 자신에게 그럴 수 있으면 좋을 것 같다. 그러려면 아무래도 또 다독多讀도 필요할 것 같다. 그렇게 책도 보고 화내는 자신도 다독이면서 기다리고 조용히 서서 버티다 보면 먼지처럼 부유하던 고민들도 바닥에 차분히 가라앉고 언젠가는 차분해지게 되는 것 같다.
[문장수집]
여러분도 그러실 겁니다. 어쩌다 이 길을 가고 있는 건지 알다가도 모를 운명 속에서 오늘도 웃다가 울다가, 애써 버티다가 허위허위 떠내려가다가, 문득 돌아보니 또 다른 길목에 서 있는 자신을 보고 계실 겁니다. / 5p
우리나라 사람들의 SNS속 텍스트에 나타난 감정어휘를 위치 기반 정보에 입각해 분석해보면, 언제나 행복도가 가장 높게 나오는 특정 지역이 있다고 합니다. 어디일까요? 바로 영종도 인천국제공항! 일상을 떠나 여행을 앞둔 이들의 희망과 기대감을 생각해보면 당연한 결과 같습니다. / 16p
하지만 모든 꽃길은 그 밑에 흙을 깔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됩니다. 흙길이 아니면 꽃을 피울 수 없습니다. 흙길이 곧 꽃길입니다. / 28p
모든 사람에게는 저마다 결핍된 그 무엇이 있을 거예요. 그걸 채워주기 위해 누구는 재화를, 누구는 용역을 제공하고 교환하는 것 아닐까요. 우리 직업의 본질이란, 이처럼 사람들이 모두 같이 살려고, 나도 살고, 너도 살리려는 데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내가 하는 어떤 일로 누군가의 이마를 덮어줄 수 있다면, 그 일이 그 순간 그렇게 지긋지긋하게 느껴지진 않을 겁니다. 우리도 서로의 이마에 손을 내밀고 그 손에 이마를 맡길 수 있는 존재들이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게 우리 모든 업의 본질이 아닐까요. / 33p
언젠가 스칸디나비아 항공을 이용할 때의 일이었습니다. 조그만 소금 봉지 같은 게 나왔는데 아무리 봐도 소금Salt이란 말이 보이질 않습니다. 거기에는 단지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The Color of Snow, The Taste of Tears’ 소금이 ‘눈의 색깔, 눈물의 맛’이라니요. 감동이었습니다. 항공사가 달라 보였습니다. 문학과 문화를 생활화하자고 백날 말만 하면 뭐합니까. 명품은 이런 디테일에 숨어 있더군요. / 41p
동서양을 막론하고 소금은 눈물의 맛입니다. 그냥 눈물의 성분이 짜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니고 소금은 눈물 없인 얻을 수 없는 귀한 존재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직장인을 샐러리맨이라고 부를 때, 그때 ‘샐Sal’의 라틴어 어원이 바로 소금입니다. 초기 로마시대에는 소금이 화폐 역할을 했다고 하죠. 그래서 관리나 병사의 급료도 소금으로 지급했는데 그 급료를 ‘살라리움’salarium이라고 불렀고, 소금이 화폐로 대체된 뒤에도 지금껏 그 명칭은 살아남아 봉급을 샐러리Salary라 부르고 있습니다. 병사를 뜻하는 영어단어 Soldier도’소금을 주다’라는 뜻의 단어 saldare에서 비롯된 것이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오죽하면 ‘평안감사보다 소금’이라는 속담이 있겠습니까. / 43p
의술, 법률, 사업, 기술, 이 모두가 고귀한 일이고 생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일이지만, 시, 아름다움, 낭만, 사랑, 이런 것이야말로 우리가 살아가는 목적. -죽은 시인의 사회 중에서- / 51p
일이냐, 삶이냐, 그 문제는 그 둘간이 조화와 균형을 생각하지 않고 우리 인생을 일과 삶의 대립으로 간주하는 데 있습니다. 모든 것은 인생을 잘 살기 위한 것, 어차피 일도 인생이고 삶도 인생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인생을 사랑하는 자는 그 둘 중 어느 하나도 놓치지 않으며 편애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 59p
너를 돌보며 내가 자랐단다. -아이- / 62p
나이만 들었지, 우리 부모들 역시 아직도 삶이 뭔지 잘 모릅니다. / 64p
바다가 가까와지자 어린 강물은 엄마 손을 더욱 꼭 그러쥔 채 놓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그만 거대한 파도의 뱃속으로 뛰어드는 꿈을 꾸다 엄마 손을 아득히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래 잘 가거라 내 아들아. 이제부터는 크고 다른 삶을 살아야 한단다. 엄마 강물은 새벽강에 시린 몸을 한번 뒤채고는 오리처럼 곧 순한 머리를 돌려 반짝이는 은어들의 길을 따라 산골로 조용히 돌아왔습니다. -성장 / 이시영 / 은빛 호각 / 창비 - / 80p
하지만 볼 품 없어 뵈는 저 발도 한때는 아장아장 걸음마를 하고, 폴짝폴짝 고무줄놀이도 한 적이 있답니다. 발바닥으로 전해지는 견고한 땅의 감각과 온화한 풀의 기운으로 그녀는 쑥쑥 자라났죠. 줄기처럼 벋어오르던 몸매, 잎사귀처럼 매끈하고 꽃처럼 빛나던 자태, 열매처럼 부풀던 가슴 속 꿈, 가시처럼 날카롭던 지혜, 그렇게 봄이 지나 여름이 가고 가을이 길다 싶더니만 어느 샌가 그녀는 바스러질 지경입니다. 스스로를 지탱하기가 버겁습니다. / 93p
돌아보니 인생은 나를 돌봐준 이와 내가 돌볼 이로 이루어진 돌봄의 연속인 것 같습니다. 부디 잘들 부탁드립니다. / 105p
막 금주를 결심하고 나섰는데 / 눈앞에 보이는 것이 / 감자탕 드시면 소주 한 병 공짜란다 / 이래도 되는 것인가 / 삶이 이렇게 난ㄴ감해도 되는 것인가 / - / 술을 끊으면 술과 함께 덩달아 / 끊어야 할 것들이 한둘이 아니다 / 그 한둘이 어디 그냥 한둘인가 / 세상에 술을 공짜로 준다는데 / 모질게 끊어야 할 이유가 도대체 있는가 / - / 나는 얕고 얕아서 금방 무너질 것이란 걸 / 저 감자탕집이 이 세상이 / 훤히 날 꿰뚫게 보여줘야 한다 / 가자, 호락호락하게 / -소주 한병이 공짜/문학의 전당/2011- / 113p
그에게 세상은 위험하고 불안하며 심지어 더럽고 저열해 보입니다. 믿을 것도, 만족할 수도, 사랑할 수도 없습니다. / 131p
원제목 As good as It gets 는 문맥에 따라서 긍정적인 의미로도 쓸 수 있고 부정적인 의미로도 쓸 수 있는 말이라고 합니다.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을 정도로 지금이 최고라는 뜻도 되지만, 더 나아질 기미가 없으니 별로 좋지도 않은 지금 이 정도가 최고라는 뜻으로 쓰일 수도 있지요. 물론 사람에 따라서는 후자의 그 부정적인 의미조차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겁니다. / 132p
결심이란, 살아온 나에 대한 부정이었고, 살아갈 나에 관한 긍정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살아온 날들을 반성하며 비장하게 결심할 때면, 살아갈 날들은 늘 밝게 빛나 보였습니다.-자주 결심했다는 것은 그만큼 그 결심이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의미일 텐데, 한사코 나를 부정하느라 나를 힘들게 하고 타인들마저 힘들게 한 것이지요. / 135p
알레고리 Allegory 어떤 한 주제 A를 말하기 위해 다른 주제 B를 사용하여 그 유사성을 적절히 암시하면서 주제를 나타내는 수사법. 은유법과 유사한 표현기교라고 할 수 있는데 읜유법이 하나의 단어나 하나의 문장과 같은 작은 단위에서 구사되는 표현 기교인 반면, 알레고리는 이야기 전체가 하나의 총체적인 은유법으로 관철되어 있다는 차이점이 있다. / 136p
어쩌면 기생충의 공간 은유는 우리 마음의 구조를 의미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프로이트의 개념에 따라 말하자면, 이 영화 속의 지상, 반지하, 지하는 각각 의식, 전의식, 무의식의 공간일 수 있고, 초자아, 자아, 이드의 관계로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잘 아시는 대로, 이드는 쾌락 원칙에 따라 움직이는 원초적 본능입니다. 삶의 본능인 에로스와 죽음의 본능인 타나토스가 함께 잠재해 있는 곳, 지하층의 생존욕과 폭력의 욕망이 바로 그런 것이죠. 그런 지하실이 있다는 걸, 아무도 알지 못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무의식의 세계는 그런 것이니까요. 반면에 초자아는 우리에게 허용된 경계선을 지어줍니다. 그러면서도 죄책감이나 수치심, 허약함, 의무감 등을 느끼는 원인이 되죠. 지상의 호화주책이 지닌 양면성이 그에 가깝습니다. - 그러한 이드와 초자아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하려 애쓰는 것이 자아, 바로 반지하라는 존재입니다. 한 번에 두 주인을 섬기지 말라 했거늘, 프로이트에 따르면 이 불쌍한 자아는 이드와 초자아, 그리고 외부세계 등 세 주인을 섬기는 상태이지요. 외부세계와 상호작용하면서 이드의 어둡고 무서운 본능을 억누르고, 초자아가 요구하는 대로 우리더러 안전, 책임, 존중 같은 걸 고려하게 만들면서 우리 자신을 지켜주는 것이 자아의 역할 입니다. / 137p
그러니 우리 마음의 지하실에 가끔은 신선한 공기를 불어넣어줘야 합니다. 냄새가 흘러나가도록 해줘야 하는 겁니다.-슬퍼하지 않을래, 불안해하지 않을래, 왜 내가 우울해야 해?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돼, 난 나약한 사람이 아니야. 이것은 마주 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피하려는 겁니다. 그건 더 위험합니다. -그 슬픔과 우울함이 흘러나갈 수 있게 길을 터주어야 하는 것이죠. / 141p
슬픔은 우리 몸에서 무슨 일을 할까? / 김경주 / 물고기는 물을 / 흘러가게 하고 / 구름은 하늘을 / 흘러가게 하고 / 꽃은 바람을 흘러가게 한다. / 142p
오늘날의 초현대사회는 개인에게서 이러한 감정을 오히려 박탈해가고 있습니다. 미국의 사회학자 스테판 메스틀비치는 [탈감정사회]에서 이렇게 묻습니다. “오늘 날 현대 사회에서 내가 느끼는 감정이 진짜 내 감정인가?” - 매스컴이나 미디어는 내 감정을 조절하고, 아예 감정적 반응을 그들이 만들어 제공해줍니다. / 146p
요컨대 대상에 대한 적당한 거리와 시간의 간격이 필요합니다. 자신에게든 타인에게든 너무 일희일비하는 것은 마음건강에 해가 됩니다. 자중자애 할 수 있도록 여유를 부여해줘야지요. -그러려면 너무 잘 하려는 마음을 조금은 버려야 합니다. 지금은 조금 못할 수도 있고, 조금 우울하거나 불행할 수도 있다고, 어차피 정답은 나중에서야 알 수 있는 거라고, 조급한 마음 내려놓고, 다그치지 말고 다독여야 합니다. / 153p
관찰, 삶의 경이를 일깨우는 힘. / 168p
어릴 적 어른들은 곧잘 인생을 나그네 길에 비유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내가 장돌뱅이처럼 살 리도 없으니 그때는 그 말을 실감할 수가 없었죠. 그런데 내가 택한 학문의 세계마저도 나그네와 다를 바가 없었음을 아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았습니다. 정처가 없으니 어디로든 갈 수 있지만 어디서도 반겨줄 이 없는 나그네나, 좋아하는 책을 읽고 공부할 수 있는 자유를 택한 대가로 아무도 대신해주지 않는 글쓰기의 외로움을 감당해야 하는 내 신세나 매양 한 가지이니 말입니다. / 192p
그런데, 그러던 사이 생각이 바뀝니다. 뜻을 이루기 위해 길을 찾는 것도 훌륭하지만, 이 길에서 뜻을 찾는 것도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하고 말이죠. 그 이후로 비로소 남들의 길이 아니라 내 안의 길에서 뜻을 찾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아, 산 정상은 내 갈 길이 아니었구나. 아, 그래서 이렇게 들길과 강 길을 지나게 된 거구나. 아 그래, 내 갈 길은 바다였는지 몰라. 다행이다. 하마터면 바다의 낙조를 보지 못할 뻔했구나. 어서 부지런히 바다를 향해 걸어가자꾸나. - 그때부터 길은 조금씩 고분고분해집니다. 꽃으로 수를 놓아 향기를 더하기도 하고, 그늘을 드리워 땀을 식혀주기도 합니다. / 194p
공부하기 딱 좋은 나이 / 이제 진짜 공부를 시작할 때입니다. / 195p
“마음을 비웠다”라는 말을 저는 잘 안 믿는 편입니다. 마음이 잘 비워지질 않더라고요. 마음은, 영혼은, 채우는 겁니다. 채우는데 뭘로 채울까가 중요한 겁니다. 얼마나 선한 것, 얼마나 귀한 것, 얼마나 사랑스러운 것으로 채울까. 그런 것들로 채워진 삶은, 행복하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이야기합니다. 사랑이란 비어있는 영혼을 그대 생각으로, 그대와 함께한 생각의 바다와 산맥과 우물과 나무로 채우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 222p
이 시는 말하고 있습니다. 비 독점 다자연애와 무자식의 자유보다 이 쇠사슬이나 거미줄 같은 구속이 낫다고 말입니다. / 230p
내 마음에 별이 뜨지 않은 날들이 참 오래 되었다 / 주용일 / 오늘 저녁 아내는 내 등에 붙은 파리를 보며 파리는 업어주고 자기는 업어주지 않는다고 투정을 부린다. 연애시절엔 아내를 많이도 업어주었다. 그 때는 아내도 지금처럼 무겁지 않았다. 삶이 힘겨운 만큼 아내도 조금씩 무거워지며 나는 등에서 자꾸 아내를 내려놓으려 했던 것은 아닐까 - 이제 내게 남아있는 것들을 생각한다. 이루지 못한 꿈들이며, 가엾고 지친 영혼이며, 닳아버린 목숨이며, 애초에는 없던 가족, 집과 자동차, 보험금, 명예 이런 것들이 별이 뜨고 지던, 노래가 생겨나던 마음을 채워버렸다. 별이 뜨지 않는 밤하늘을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노래가 없는 생을 한 번도 떠올려보지 않았는데 그런 날들이 참 오래되었다. / 244p
이 쟁쟁한 타자들은 알량한 패만 / 들고 있는 나와는 외사돈의 팔촌도 아니지만 / 그들의 행복이 촌수만큼이나 아득한 길을 / 돌고 도라 어느 세월에 내게도 연결되지 / 말라는 보장도 없지 않은가 [읽자마자 잊혀져버려도] 문학동네, 2011 / 259p
예술같은 모든 창조의 허구적 측면에는 거기에 어울리는 페르소나가 필요합니다. 시도 마찬가지 입니다. 시에서 작품 속의 화자인 ‘나’와 작품 밖의 ‘나’인 시인은 다른 존재입니다. 이 둘이 가까우면 담백하고 진실된 목소리를 듣게 되지만 너무 가까워지게 되면 시의 긴장이 느슨해질 위험이 있습니다. / 269p
도처에 반짝반짝 빛나는 것들 투성이지요. 하지만 반짝이는 것은 별이 아니라 모래일 수도 있습니다. 모래가 별이 되려면 오랜 시간 동안, 자신이 별이라 믿으며 견뎌야 하는데, 그러다간 자칫 리플리가 되기 일쑤라는 데 함정이 있는 겁니다. / 274p
책 버리기는 참 어렵습니다. 읽은 책은 읽어서, 안 읽은 책은 읽지 않아서 못 버립니다. / 297p
하지만 푸름은 희망과 설움의 접경지대 입니다. 푸름은 희망에도 어울리고 설움에도 어울려서, 푸른 희망이라고 하면 희망이 더 희망차게 들리고, 푸른 설움이라고 하면 설움이 더 서럽게 들리는 것처럼 말이지요. / 330p
생의 끝에는 아무 것도 없다 / 아무것도 없는 곳으로 가기 위하여 / 많은 짐을 지고 이 고생이다 [내 몸에 우주가 손을 얹었다/세계사/2000] / 335p
죽을 날이 그리 멀지 않음을 기억하는 것은 인생의 중대한 결정을 내리는 데 도움이 되는 도구들 중 가장 중요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거의 모든 것들, 모든 외부로부터의 기대, 자존심, 당혹감이나 실패에 대한 두려움 등 이 모든 것들은 죽음 앞에서 맥을 추지 못하며 정말 중요한 것만 가려내주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은 여러분이 무언가를 잃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함정을 피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이미 가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가슴으로 느끼는대로 따르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스탠퍼드 대학졸업 축사 / 스티브 잡스 - / 33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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