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베스 길버트 _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_ 노진선 옮김 _ 솟을북 _ 에세이 _ 영미에세이]
우리는, 아마도 우리 모두는 우리와 세상의 연결이 끊어지지 않았다고 느낄 때 가장 안도감을 느낀다. 책을 보다가 나와 닮은 문장을 만나거나, 그 문장이 나를 위해 쓰여진 것처럼 느낄 때, 여행을 하다 문득 들른 장소에서 아름다운 광경을 만나거나 좋은 사람들과 마추칠 때, 이런 경험들은 신의 존재를 떠올리게 한다. 나는 미사에도 참여하지 않는 제멋대로의 신자지만, 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인간은 아니다.
이 책은 신의 보살핌을 느끼게 해 준다. 그리고 신이라는 존재는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삶의 밑바닥에서 허우적대고 있던 어느 날, 그녀의 기도가 시작된다. 그리고 그녀의 여행도 함께 시작된다. 운명과도 같은 영적 스승을 만나고, 이탈리아에서 우울증과 싸우며 자유롭게 여행하고, 인도로 가서는 수행자로의 시간을 보내고, 인도네시아 발리에서는 평화로운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그녀는 마침내 사랑을 만나게 된다.
동화같은 끝맺음에도 불구하고, 실재로 벌어진 일이고, 결과적으로 그녀를 구원한 것은 그녀 스스로였기 때문에 가볍지만은 않은 이야기이다. 그녀는 ‘모든 것은 빛난다’에서도 만난적이 있었던 작가 엘리자베스 길버트이다. 그녀의 문장은 지나치게 솔직하고 재기발랄하며 사물에 대한 통찰력으로 넘친다. 그 통찰력은 그녀가 이탈리아와 인도, 그리고 인도네시아 발리라는 대조적인 여행지를 선택한 것에서부터 느낄 수 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흥미롭거나 닮고 싶다고 생각하는 작가의 책을 읽고, 글을 쓸 때, 나도 모르게 그 작가의 스타일을 흉내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멋지다고 생각되거나 존경스러운 사람을 만나면 닮고 싶어지고, 행동도 달라지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나는 예의를 지켜주는 척 하면서 은근히 빈정거리는 것 같은 그녀의 유머러스한 문장들이 마음에 든다. (가능하면 그 스타일을 배워서 종종 만나게 되는 얄미운 사람과 말싸움을 할 때 사용하고 싶다.)
반복되지만 변화하지 않는 일상에 지쳐 스스로를 의심하고 있거나, 자신의 내부에서 끊임없이 들려오는 소리로 힘들어하는 사람들, 여행을 떠나고 싶은, 여행을 떠나야 할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싶다. 이 책은 우리를 우리 내면의 더 깊은 곳으로 여행하게 해주는 좋은 안내서이다. 어쩌면 당신은 이 책을 읽은 뒤 갑자기 여행의 행선지를 충동적으로 바꾸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곳이 실재로 존재하는 여행지이든 아니든 상관은 없을 것 같다.
다만, 광신도라던가 종교의 이름으로 가족을 파괴하는 사이비종교지도자, 선동가, 불평분자, 모반자 등등의 사람들은 이 책을 읽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들이 이 책을 읽으면 분명 자신의 행동에 의심을 가지게 될 것이고, 그건 그동안 그들이 이루어온 것들을 파괴할테니까. (어차피 읽을 생각도 안하겠지만.)
내가 이렇게 쓸데없는 생각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쯤, 이 책을 읽은 그 누군가는 아마도 계획하지 않았던 자신만의 새로운 여행을 시작하고 있겠지. 그러기 전에 우선 명상을 시작했거나.
[문장수집]
고백하건대 나는 일반적으로 신을 ‘그Him’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그 명칭도 거슬리지 않는다. 내게 그것은 그냥 편리한 인칭대명사일뿐 성별을 정확히 구분한 명칭도, 혁명의 대의명분도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사람들이 신을 ‘그녀Her’하고 부른다고 해도 개의치 않으며, 그렇게 부르고 싶어하는 마음 또한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오로지 기독교만이 신에게로 가는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하는 기독교의 논리는 받아들일 수 없다. 그렇다면 엄밀히 말해서 나 자신을 기독교도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내가 아는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이런 내 감정을 자비로움과 열린 마음으로 이해해준다. 또한 내가 아는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아주 엄격한 기준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엄격한 기준을 가진 분들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분들의 감정을 상하게 한 것을 사과하며, 더 이상 그분들 영역에 끼어들지 않는 것뿐이다.
그리고 이제 그의 관심이 시들어가자 나는 쉽게 예측할 수 있는 증상에 시달렸다. 중독은 맹목을 바탕으로 한 모든 사랑 이야기의 단골손님이다. 이는 애정의 대상으로부터 우리가 원하고 있다고 감히 인정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아찔하고, 환각적인 그 무엇을 받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아마도 천둥 같은 사랑과 영혼의 밑바닥까지 뒤흔드는 짜릿함이 섞인 감정적 마약쯤 될까. 이내 우리는 여느 마약 중독자의 배고픈 집착으로 그 강렬한 감정을 갈구하기 시작한다. 투약이 보류되면 금세 미치광이 환자가 되고 만다. (애초에 이 중독을 부추겨놓고, 이제 와서 물건을 팔지 않겠다고 버티는 마약상에 대한 분노는 말할 것도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가 어딘가에 그 물건을 숨겨 놓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빌어먹을, 왜냐하면 전에는 공짜로 주던 물건이니까.)
하지만, 왜 모든 일에 꼭 실용적 가치가 있어야 한단 말인가? 난 수년간 근면한 일개미로 살았다. 일하고, 생산하고, 마감을 한 번도 어기지 않고, 사랑하는 가족들과, 잇몸, 신용카드 기록, 투표 등등을 관리하면서, 인생에는 오로지 의무밖에 없단 말인가? 슬픔의 암흑기에 처한 내게 이탈리아어를 배우는 것만이 지금 당장 즐거움을 가져다 줄 유일한 활동이라는 이유 외에 달리 무슨 이유가 필요하단 말인가. 게다가 이건 얼토당토 않은 목표도 아니다. 어쨌거나 외국어를 배우는 거니까. 서른 두 살의 나이에 “난 뉴욕 시티 발레단의 수석 무용수가 될 거야.”라고 말하는 것도 아닌데.
여기 로마에서는 교황의 건강이 마치 날씨처럼 매일 신문과 텔리비전에 보도된다. 오늘은 교황님이 피곤하십니다. 어제는 오늘보다 덜 피곤하셨고, 내일은 다시 오늘보다 덜 피곤하실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들에게 빈둥거림의 미덕은 모든 노동의 목표이자, 가장 축하해야 할 최종 업적이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부자여야 할 필요는 없다. 이탈리아에서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기술(l’arte d’arrangiarsi)’이라는 또 하나의 멋진 표현이 있다. 간단한 몇 가지 재료만으로 진수성찬을 차려내는 기술, 혹은 친구 몇 명만 모아놓고도 축제를 벌이는 기술을 말한다. 꼭 부자여서가 아닌 행복을 만들어내는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이다.
할아버지는 이렇게 외쳐댔다. 야, 야, 야, 알베르티니, 좀 잘해봐......그렇지, 그래, 잘한다, 완벽해, 최고야, 최고......어! 그래! 계속 가! 가! 골을 넣어! 그래, 그래, 그래, 잘한다. 아이고, 이뻐라, 그렇지, 그래, 그거야-아아아아악! 가서 뒈져라! 이 개자식아! 머저리! 저 등신! 역적 같으니!...... 성모님...... 저럴수가, 왜, 왜, 왜, 저런 머저리, 부끄러운 줄을 알아......부끄러운 줄......개판이군......배짱도 없는 놈 같으니라고, 알베르티니!!! 에라 이 사기꾼아! 저봐, 삽질이나 하고......그래, 그래, 야, 그래......좀 낫다, 알베르티니, 훨씬 낫네, 그렇지, 그래, 그래, 잘했어, 예술이다, 끝내줘, 아, 최고야, 이제 실력이 나오는구나...... 골로 만들어, 골로 만들어, 골—뒈에에져라!!!
정신나간 린다, 비록 린다의 정신은 멀쩡했지만 난 그녀를 그렇게 불렀다.
그럼에도 나는 시칠리아 사람들이 대대로 그들의 품위를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었던 것과 내 존엄성 회복에 도움이 되었던 것이 결국에는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곧 즐거움의 가치를 깨닫는 것이 한 개인의 인간성에 닻이 되어 준다는 생각이다.
칠흙같은 시기를 보낸 뒤에는 행복의 희미한 가능성이라도 감지되면 어떻게든 그 행복의 발목을 움켜쥐고 그것이 날 진창에서 일으켜줄 때까지 절대 손을 놓지 말아야 하는 법이다. 이건 이기적인 행동이 아니라 의무다. 우리는 삶을 부여받았고, 이 생에에서 아무리 하찮은 것일지라도 뭔가 아름다운 것들을 찾아내는 것은 우리의 의미(이자 인간으로서의 권리)이다.
요가에서 말하는 당장 해야 할 일이란 합일을 도모하는 일이다. 몸과 마음 간에, 한 개인과 그 사람의 신 간에, 우리의 생각과 그 생각의 근원 간에, 스승과 제자 간에, 심지어는 우리 자신과 뻣뻣하기 그지없는 우리의 이웃들 간에도.
진정한 요가는 어떤 종교와도 경쟁하지 않으며, 어떤 종교도 배제하지 않는다.
요가의 방침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가지는 태생적 결함을 풀어나가는 것이다.그 태생적 결함이란 극도로 간단히 정의하자면 만족스런 상태를 유지할 줄 모르는 가슴 아픈 무능력이다. 지난 수세기 동안 여러 학파들은 인간의 이런 선천적인 결함에 대한 해답을 각기 다른 각도에서 찾아왔다. 도교에서는 이를 불균형이라 부르고, 불교에서는 무지라 부르며, 이슬람교에서는 인간의 불행이 신에 대한 반항 때문이라고 비난하고, 유대교와 기독교의 전통에서는 인간의 모든 고통의 원인을 원죄로 돌린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불행은 타고난 욕구와 문명의 필요 간의 충돌이 빚어낸 피할 수 없는 결과라고 말한다. 그러나 요가철학자들은 인간의 불만족은 자신의 정체성을 오해한 결과라고 말한다. 우리의 한정된 자아가 우리 본질의 전부라는 잘못된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내면 깊은 곳에 존재하는 보다 신성한 특질을 깨닫지 못한다. 모든 인간의 마음 속 어딘가에는 영원히 평화로운 최상의 자아가 존재한다는 걸 깨닫지 못한다.
모든 여인의 이마 한가운데에는 반짝이는 보석 빈디bindi가 박혀 있었는데, 마치 우리 머리 위로 떨어진 별빛의 희미한 여운 같았다.
명상은 요가의 닻이자 날개이다. 기도가 신에게 말하는 것인 반면, 명상은 듣는 행위라고 한다. 대부분의 인간과 마찬가지로 나는 ‘원숭이 마음’이라고 하는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 내 생각은 가지와 가지 사이를 쉼 없이 뛰어다니고, 오직 몸을 긁거나 침을 뱉거나 소리를 지를 때만 멈춘다.
넌 능력도 있는데다가 인생에서 네가 원하는 걸 얻는데 익숙해졌어. 그런데 최근 몇 번의 연애에서는 네가 원하는 걸 얻지 못했지. 그것 때문에 완전히 고장이 나버린 거야. 이번만은 인생이 네 뜻대로 되지 않았어. 독불장군에게 인생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것보다 미치는 일은 없지.
그러나, 내게는 선택권이 많지 않았다. 나는 너무도 오랫동안, 너무도 많은 방법으로 미친 듯이 마음의 평화를 찾아다녔고, 그 모든 성취와 재물들은 결국에는 약발이 떨어지기 마련이다. 인생이란 죽을 힘을 다해 쫓아간다면 결국에는 우리를 죽음으로 몰고가기 마련이다. 강도를 쫓듯이 시간을 쫓는다면, 시간 역시 강도처럼 교묘하게 빠져나갈 것이다.
어느 순간이 되면 그냥 멈춰야 한다. 이 숨바꼭질은 절대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시간을 붙잡을 수 없다는 걸, 그걸 기대해서도 안된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 리처드가 내게 계속 말했듯이, 어느 순간이 되면 그냥 놓아버리고 가만히 앉아 만족감이 우리를 찾아오도록 허락해야 한다.
각 종교의 많은 학자들이 우리를 앉혀놓고 자신들이 쓴 책을 들이밀며 그들의 신념이 얼마나 이성적인지 아무리 설명하려 해도 난 관심없다. 신념이 이성의 영역이라면, 그건 신념의 정의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신념이란 보거나, 증명하거나, 만질 수 없는 것을 믿는 것이다. 신념이란 어둠을 향해 정면으로, 전속력으로 걸어가는 것이다. 인생의 의미, 신의 본질, 우리 영혼의 문제에 대한 답들을 미리 모두 알고 있다면 그것은 신념의 도약이 아니며, 인류의 용감한 행동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그건 단지......신중한 보험증서에 불과하다.
난 그저 신을 원한다. 내 안에 신이 있기를 원한다. 햇살이 강물위에서 즐겁게 놀듯이 내 혈액 속에서 신이 놀기를 바란다.
운명 역시 연인 관계와 같다. 운명은 신의 은총과 의식적인 자기 노력 사이의 놀음이다. 운명의 절반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지만, 나머지 절반은 완전 우리 손아귀에 있기에 우리의 행동이 결과에 큰 차이를 가져올 수 있다. 인간은 단순한 신의 꼭두각시도, 자기 운명의 완벽한 지휘관도 아니다. 양쪽 모두라고 해야 할 것이다.
저녁이면 자전거 페달을 열심히 밟아 언덕 위로 올라가 초록빛의 아름다운 광경이 펼쳐진 우붓 북쪽의 드넓은 논을 가로지른다. 핑크색 구름이 논에 고인 잔잔한 물 속에 비쳤다. 마치 두 개의 하늘이 있는 것처럼, 하나는 신들을 위한 천상의 하늘, 하나는 가련한 인간들을 위해 질척질척한 흙 속에 담긴 지상의 하늘.
나는 행복에 관한 구루의 가르침을 계속 기억하려고 노력한다. 그녀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행복을 행운, 운이 좋은 사람에게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쯤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하지만 행복은 그런 식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행복은 개인적 노력의 결과다. 행복을 얻기 위해 싸우고, 노력하고, 주장하고, 때로는 행복을 찾아 세상을 여행하기도 해야 한다. 그리고, 일단 그 행복의 상태에 도달했으면, 그것을 유지하는 걸 게을리 해서는 안된다.- 고통에 처했을 때 기도하는 건 너무 쉽다. 하지만 위기의 순간이 지난 뒤에도 계속 기도하는 건 일종의 봉인 작업과 같다. 우리의 영혼이 그 좋은 성취물을 꼭 붙들고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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