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처럼 사소한 것들 _ 클레어 키건 _ 홍한별 옮김 _ 다산북스 _ 소설 _ 영미소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긴 겨울을 견디기 위해서는 따듯한 온기가 필요하다. 온기를 얻기 위해서는 뭔가를 태워야 한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 중 뭔가를 태워야 매서운 추위를 견뎌내고 봄을 기대할 수 있다.
주인공 빌 펄롱은 석탄과 목재를 파는 사람이다. 홀어머니 밑에서 태어나 비웃음과 놀림을 당했던 학교시절을 지나 지금은 아내와 다섯 딸을 돌보고 있는 성실하고 좋은 아버지다. 비록 넉넉한 형편은 아니지만 펄롱의 가족은 행복하고 단란하다. 하지만 펄롱은 항상 원인을 알 수 없는 불안함과 긴장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그것은 그와 그의 가족이 살고 있는 사회가 가진 혼란스러움과도 연관을 가지고 있다.
주인공이 살고 있는 사회는 혹독한 변화의 시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이야기가 펼쳐지는 계절이 겨울이라 그것은 더 매섭게 느껴진다. 쉬지 않고 불어대는 겨울바람과 같은 삶의 문제들은 사람들에게 쉴 틈을 주지 않는다. 잠시라도 움직이지 않으면 발은 눈과 성애로 뒤덮이고, 바람을 타고 온 날카로운 얼음조각에 온몸이 긁히기도 한다.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의 빌 펄롱에게 잠시 멈추어서 생각해보고 돌아볼 시간은 좀처럼 주어지지 않는다. 그의 일상은 지루하게 반복된다.
하지만 자리에 서 있기도 힘든 이에게 삶은 또 선택을 요구한다. 그리고 그것은 그가 그토록 지키고 싶어했던 안정과 평화를 무너뜨릴 수도 있는 위험한 선택이다. 땔감을 배달하러 간 수녀원에서 그는 그 장소와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의 아이들을 발견한다. 아이들은 구원의 신호를 보내지만 그는 애써 무시한다. 그 시절 수녀원의 힘은 막강했고, 그 힘은 분명 그들의 뜻을 거스르는 자들을 그냥 두고 보지 않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마을사람들도 그것을 모두 알고 있었고, 주인공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주인공은 방황한다. 평화와 안정이 보장될 것이라는 환상과 누군가를 구해야 한다는 마음속의 외침과 아직 하지도 않은 행동을 만류하는 이웃과 아무런 관심이 없는 사람들 속에서. 그리고 마침내 선택한다. 그는 불안한 걸음으로 방황하던 길을 지나 수녀원으로 가 아이를 구해낸다.
한 인간이 자신의 삶에 미칠 수 있는 힘은 너무나 미약하고 나약해서 삶을 변화시키는 아주 자그마한 우연이나 운조차 자기 멋대로 선택할 수 없다. 그나마 유일하게 선택할 수 있는 것은 현재인데, 이 현재 역시 순식간에 과거가 되어버리므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시간은 찰나와 같다. 우리가 선택하는데 시간을 많이 허비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선택에 들인 시간 때문이 아니라 선택을 위해 고민한 시간 때문이다. 그것이 우리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직관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오래 고민할 수밖에 없다. 주인공 역시 그런 이유로 오래 방황한다. 그리고 그의 선택 덕분에 방황은 이후로도 꽤 더 오래 이어질 듯하다.
우리 역시 주인공처럼 살아가면서 수많은 선택을 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의 선택이 결코 한 개인의 삶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나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생존을 위한 선택이라고 할지라도 어쩌면 그 선택의 반대편엔 다른 이들의 희생과 슬픔이 잠재하고 있을 수 있다. 우리가 그것을 안다고 해서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지만, 적어도 우리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어떤 곳에서든 우리는 서로 미세하게 연결되어 있다. 연결은 우리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 겨우 우리가 감지할 수 있는 깊은 바닥의 속에 또 어떤 심연이 숨어있을지 모르는 일이다.
사소하지 않은 이야기에 사소하다는 제목을 붙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반어법을 써 주제를 더 강조하려고 했을 수 있고, 너무 익숙해져서 사소해져 버린 것들을 다시 상기시키려는 시도일 수도 있으며, 자신에게 닥친 삶의 문제를 해결해 나가려는 개인의 미약함을 표현한 것일수도 있다. 그 이유가 어떤 것이든 나는 이 제목이 마음에 든다.
작가에 따르면 이 소설은 실제 인물을 기반으로 하지 않는 허구다. 하지만 1996년에 문을 닫은 아일랜드의 마지막 막달레나 세탁소는 현실에서 많은 여성과 아이를 은폐, 감금, 착취했다. 이 시설은 가톨릭교회가 아일랜드 국가와 함께 운영하고 자금을 마련하는 곳이었다. 정부에서는 이 사건에 대해 아무런 뜻도 표명하지 않다가, 2013년이 되어서야 엔다 케니 총리가 사과문을 발표했다. 우리는 어쩌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들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력을 받아서는 안될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의 아주 익숙하고, 아주 사소한 선택을 통해서.
[문장수집]
10월에 나무가 누레졌다. 그때 시계를 한 시간 뒤로 돌렸고 11월의 바람이 길게 불어와 잎을 뜯어내 나무를 벌거벗겼다. 뉴로스 타운 굴뚝에서 흘러나온 연기는 가라앉아 북슬한 끈처럼 길게 흘러가다가 부두를 따라 흩어졌고, 곧 흑맥주처럼 검은 베로barrow강이 빗물에 몸이 불었다. / 11p
그러다가 밤이 왔고 다시 서리가 내렸고 한기가 칼날처럼 문 아래 틈으로 스며들어, 그럼에도 묵주기도를 올리려고 무릎 꿇은 이들의 무릎을 할퀴었다. / 12p
모든 걸 다 잃는 일이 너무나 쉽게 일어난다는 걸 펄롱은 알았다. / 22p
뭔가 작지만 단단한 것이 목구멍에 맺혔고 애를 써보았지만 그걸 말로 꺼낼 수도 삼킬 수도 없었다. / 56p
벌써 까마귀들이 나와 줄줄이 앉아서 쉰 목소리로 짧게 악악거리거나 길고 유려하게 까아아아 울며 세상이 못마땅하다는 티를 냈다. / 61p
야적장 정문에 도착했는데 자물쇠가 성애로 덮여 꿈쩍 않는 걸 보고는 삶이 고달프다는 생각이 들었고 지금 침대 속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 / 63p
삶에서 그토록 많은 부분이 운에 따라 결정된다는 게 그럴 만하면서도 동시에 심히 부당하게 느껴졌다. / 64p
“누구나 어딘가에서 태어나지 않았겠습니까.” 펄롱이 말했다.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고요.” / 81p
수녀원장이 준 돈을 받았고 텅빈 식탁에 앉은 아이를 작은 카디건 아래에서 젖이 새서 블라우스에 얼룩이 지는 채로 내버려두고 나와 위선자처럼 미사를 보러 갔다는 사실이었다. / 99p
좋은 사람들이 있지. 펄롱은 차를 몰고 시내로 돌아오면서 생각했다. 주고 받는 것을 적절하게 맞추어 균형 잡을 줄 알아야 집 안에서나 밖에서나 사람들하고 잘 지낼 수 있단 생각을 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을 하는 순간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특권임을 알았고 왜 어떤 집에서 받은 사탕 따위 선물을 다른 더 가난한 집 사람들에게 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늘 그러듯 크리스마스는 사람들에게 가장 좋은 면과 가장 나쁜 면 둘 다를 끌어냈다. / 103p
그 사람들이 갖는 힘은 딱 우리가 주는 만큼 아닌가요? /106p
주머니에 손을 깊이 찔러 넣고 부둣가를 따라 걸으면서 들은 이야기를 되새기며 강이 눈을 삼키며 검게 흐르는 것을 보았다. / 107p
펄롱의 구두를 닦아주고 구두끈을 매주고 첫 면도기를 사주고 면도하는 법을 가르쳐주었던 사람이다. 왜 가장 가까이 있는 게 가장 보기 어려운 걸까? / 111p
머리를 자르고 값을 치르고 밖으로 나왔을 때는 눈이 쌓여 있었고 인도 위에 먼저 간 사람과 뒤따라온 사람의 발자국이 양쪽으로 뚜렷하면서도 또 그다지 뚜렷하지 않게 남아 있었다. / 111p
베로강이 자신이 갈 길을 안다는 것, 너무나 쉽게 자기 고집대로 흘러 드넓은 바다로 흘러간다는 사실이 부럽기도 했다. / 117p
두 사람은 계속 걸었고 펄롱이 알거나 모르는 사람들을 더 마주쳤다. 문득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나날을, 수십 년을, 평생을 단 한번도 세상에 맞설 용기를 내보지 않고도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부르고 거울 앞에서 자기 모습을 마주할 수 있나? / 119p
하지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일은 이미 지나갔다. 하지 않은 일, 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은 일 – 평생 지고 살아가야 했을 일은 지나갔다. / 121p
[옮긴이의 글 중에서]
소설가 존 맥가헌은 좋은 글은 모두 암시이고 나쁜 글은 전부 진술이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 12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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