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바리안 데이즈 _ 윌리엄 피네건 _ 박현주 옮김 _ ALMA _ 에세이 _ 영미에세이]
저자 윌리엄 피네건은 2016년 이 책으로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같은 해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여름휴가 도서목록에 포함되어 더 유명해졌다. 이 책은 작가의 파란만장한 삶의 여정을 함께 해온 서핑을 소재로 한 자전적 에세이이다.
나에게 이 책을 짧게 요약하라면 이렇게 적겠다. ‘그는 서핑을 하며 세계를 여행했다, 그가 원래 살았던 영혼의 안식처인 미국과, 수많은 불안정한 파도를 가지고 있는 여러 나라들을 들락날락하며. 그리고 그 여행의 와중에 틈틈이 읽고 썼다.’
서핑에 대한 이야기가 책의 주류를 이룬다. 그런데 이 책은 600쪽이 좀 넘는다. 그 긴 분량 중에 주류를 이룬다고 할 정도니 서핑에 대한 이야기가 얼마나 많이 나오는지 짐작이 될 것 같다. 수많은 서핑용어와 서핑을 하기 위한 해양정보가 이어지지만 사실 그런 것들은 나에겐 크게 관심이 가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래서 솔직히 말하자면 주인공이 바다에서 위험을 피하듯, 상당히 빠른 속도로 뛰어넘은 부분이 많았다. 그게 사실 이 책을 완주할 수 있었던 비법의 반 정도다. 나머지 반은 읽는 동안 지루하다는 생각이 여러번 들었는데 이상하게도 중간에 포기하지 않았다. 뭐 그건 이 책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매력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런데, 그 매력이 뭔지 말로 설명이 잘 안된다. 뭐, 가끔은 이런 방식도 나쁘지 않을거라 생각해본다. 어차피 모든 걸 다 읽어내는 건 불가능하고, 다 읽었다고 해서 모든 걸 다 기억하고 이해하는 것도 아니며, 중요한 건 내가 책을 읽는 동안 즐거워야 하는 것이니까.
매력에 대한 부분을 뭉뚱그리고 넘어가긴 했지만, 작가의 이야기들이 길면서도 흥미로운 이유는 파도타기라는 행위 자체가 우리의 인생과도 닮아 있어서인지 모른다. 우선 파도타기에 좋은 장소와 날씨를 선택하고, 수많은 파도들 중에 올라타기 좋은 파도를 찾아서, 바다에 뛰어들고, 그동안 익힌 기술로 올라탄 다음, 불규칙적이고 무차별적인 자연의 도움과 방해를 감수하고 파도와 함께 앞으로 나아가는 그 일련의 행위 말이다.
작가의 인생에는 아무래도 우리가 공감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을 수 밖에 없었던 것 같다. 태어나고 자라온 환경 자체가 다르다고나 할까. 물론 그런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그 삶의 내용들이 책이 되고, 퓰리처 상을 수상할 수 있었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삶의 궤적 자체가 다르다. 주인공의 여정은 무모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자유로운데 신기하게도 공부를 멈추지 않고 있고 어떻게 든 먹고 살아가다가 나중에는 잘 먹고 살게 된다. 그 과정에서 놀라울 정도로 위험한 상황에 맞닥뜨리고, 병에 걸리고, 다치고,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와중에도 주인공은 서핑을 포기하지 않는다. 이런 작가를 보고 있노라면 나는 저 나이에 얼마나 치열하게 인생을 살았나 하고 돌아보게 된다.
서핑에 관한 전문용어들이 많이 나와서 서핑을 잘 모른다면 책을 읽는 초반에는 검색엔진을 옆에 켜 놓고 모르는 단어들을 검색해가며 읽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 와중에도 친절하지 않은 설명을 마주했을 땐 어쩔 수 없이 머리 속으로 상상할 수 밖에 없고, 뭐 그러다보면 점점 익숙해져간다. 지명을 검색할 경우에는 뜻을 찾기 원하는 검색어를 한참 뒤로 미루어두고 유명브랜드의 브랜드명을 화면 가장 잘보이는 자리에 떡 하니 당당하게 올려놓는 검색엔진의 자본주의적 파렴치함도 맞볼 수 있었다. 주인공이 서스데이아일랜드에서 온 사람들을 만났을 때 (물론 나도 오래된 브랜드명이 먼저 떠올랐지만) 나는 이 지명이 어디를 말하는 건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검색엔진을 켰다. 서스데이 아일렌드가 파푸아뉴기니 근처, 오스트레일리아의 퀸즐랜드주에 속한 섬이라는 것을 알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렸다. (모두 알고리즘 덕분이다.)
어쨌든 그렇게 공부를 하며 진도를 나가도, 끊임없이 나오는 이야기들, 주인공과 친구들이 서핑을 할 수 있는 파도를 찾는 지점들에서는 지루할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작가가 글로 표현한 바다의 움직임을 입체적으로 읽을 수 없었다. 다만 그의 정신이 바다를 향해 파도치는 느낌이 들면 이상하게 다시 몰입되곤 했다. 확실히 바다와 파도, 서핑을 아는 사람은 훨씬 즐겁게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뭔가를 조금만 더 알아도 인생이 즐거워지는 것처럼.
한 비범한 사람의 일생을 들여다 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가 지난 기억들을 아주 세세하게 기억하고 있고 솔직하다는 점에서, 읽는 시간이 결코 아깝지 않은 책이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세계에서 각자의 세계를 만든다. 그것이 가족을 구성하는 것이건,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해 나가는 것이건 그 형태와 방법, 종류에 관계없이 그것들은 모두 우리 각자가 만든 또 하나의 세계라고 생각한다. 이 책을 본 뒤에는 조금 더 용기를 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PS. 이 책의 속지 첫 장은 깊은 바다의 색, 울트라 마린, 터키색이다. 바다가 빠질 수 없는 작가의 이야기에 대한 북디자이너의 세심한 배려가 아름답다
[문장수집]
거기서는 모든 것이 다른 것과 성가실 정도로 얽힌다. 파도는 경기장이었다. 파도는 목표였다. 동시에 파도는 적수이고, 복수의 여신이며, 심지어 철천지 원수였다. 그리고 서핑은 피난처, 행복한 은신처였지만 살아남기 힘든 황야이기도 했다. / 38p
그래도 아무리 아이라고 해도 매일 그 크기를 측정해야만 했다. 자신의 한계를, 신체적이고도 감정적으로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알아야 한다는 압박이 있었고, 실제로 이것은 생존의 문제였다. 하지만 시험해보지 않는다면 자신의 한계를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그 시험에 떨어진다면? 또한 일이 잘못된다고 해도 침착해야만 했다. 공포는 익사로 향하는 첫걸음이라고, 모두들 말하곤 했다. / 38p
하와이 문화는 파괴되었고, 사람들은 유럽산 질병으로 대거 사망했다. .1778년부터 1893년 사리에, 하와이 인구는 대략 80만에서 4만으로 줄었고, 19세기 말 무렵에는 서핑이 거의 사라졌다. 하지만 웨스트윅과 뉴설은 하와이 서핑을 성공적 선교 열정의 희생양이라기보다는 극단적인 인구 감소와 토지 박탈, 그리고 백단유, 포경, 설탕 등 채취 산업의 연쇄가 일으킨 결과로 보았다. 살아남은 섬 주민들은 현금 경제에 몰리며 여가 시간을 빼앗겼다. / 52p
그 순간은 거대하고, 잔잔하고, 반짝거렸으며, 일상적이었다. 나는 그 각각의 부분을 기억 속에 고정해 놓으려 했다. 서핑이라는 문제에서 내게 선택권이 있다는 생각은 스치듯이라도 해본 적이 없었다. 나는 매혹되었고, 그 감정이 이끄는 곳으로 따라갔다. / 70p
나는 이제는 다저스의 투수가 되겠다는 꿈을 버렸듯이, 대회에서 우승하겠다는 꿈도 꾸지 않았다. 새로이 대두된 이상은 문명에서 멀어진 고독, 순수 그리고 완벽한 파도였다. 로빈슨 크루소, <파도 속으로>처럼 말이다. 이것은 고전적 의미의 시민사회로부터 멀리 떠나 우리가 훗날 야만인으로 살게 될, 지도에서도 삭제된 변경을 향해 가는 길이었다. 행복한 게으름뱅이의 백일몽만은 아니었다. 이것은 그보다 더 깊은 개념이었다. 몸과 마음을 다해 파도를 쫓는 것은 심오하게 자기중심적인 동시에 자아가 없는 행위이며, 역동적인 동시에 금욕적이고, 의무와 관습이라는 의미에서의 성취라는 가치를 거부한다는 면에서 급진적이었다. / 151p
존재론적 정신분석학자 R.D. 랭은-그는 브라운처럼 일반적 통념을 지닌 급진적 비평가이며, 정신질환을 비정상적인 세계에 대한 정상적인 대응으로, 일종의 ‘샤먼적’여행으로 보고자 했다.-초기 저작 중 하나에서 ‘존재론적으로 안전한’사람에 대해서 묘사했다. 그게 나는 아니지, 하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열정적으로 읽고 썼다. / 220p
우리는 분명 다른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다. 나는 10대의 서정적 초현실주의자, 딜런 토머스 같은 언어-술주정뱅이로 시작해서, 천천히 깨어나려 하고 있었다. 나는 이제 투명성과 정확성에 더 관심이 있었고, 과시적인 독창성에는 애정이 식었다. 브라인언은 여전히 단어의 음악성에 매료되어 있었다. / 321p
이런 글들이 이렇게 가혹하고 헛소리는 용납하지 않는 사막의 빛에서도 버틸 수 있을까? 어떤 글들은 꽤 괜찮게 견뎌냈다. 문체는 여전히 강했고, 이야기는 여전히 재미있었다. 하지만 가식과 군살은 무자비한 관찰 아래서 형광빛을 발했으며, 어떤 작가들은 갑자기 온실의 꽃으로 자라나 허식만 차리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들은 의도와 상관없이 유쾌했다. / 347p
나는 도착하자마자 그 이유를 꺠달았다. 황홀한 파도를 담은 황홀한 사진들이 미국의 서핑잡지에 실렸던 것이었다. 반쯤 은밀했던 시대는 이제 끝나버렸다. 열다섯 명이 왔으면 곧 쉰 명이 올 것이었다. / 387p
그녀에게 중요한 건 그림 제작뿐이었다. 특히, 에칭 작품. 그녀의 동판 작업 과정은 정교하고 엄청나게 노동집약적이어서, 거의 중세적이었다. 미술학교의 동급생들은 그녀의 장인 정신, 기술적 지식, 강박증, 그녀의 눈에 경의를 품은 듯했다. / 426p
어머니는 이야기를 알아보는 눈이 날카로웠고, 작가, 감독, 배우, 방송국 임원 들과 잘-편하게, 생산적으로-지내는 걸로 유명했다. 단순하게 들리지만 정말로 드문 재능이었다. / 450p
내게, 그리고 나뿐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도 서핑은 이런 역설을 품고 있다. 파도와 단둘이 있고 싶다는 욕망이 그만큼이나 남들에게 보이고 싶다는, 한편으로는 연기를 하고 싶다는 욕망과 융합한다. / 466p
우리는 뉴욕에서 8년동안 살았다. 나는 천천히 여러 업무를 돌아가며 맡았다. 칼럼, 기사, 책, 언론. 나는 마흔이 되었다. 우리는 하나의 세계를 만들었다. / 51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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