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경원 _ 디자인 인문학 _ 허밍버드 _ 디자인 _ 예술 대중문화 _ 색채 디자인이론]

우리는 가끔 운 좋게, 관성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던 것들을 바꿔주는 책들을 만나게 된다. 연결되기 힘들어 보이는 두 지점의 지식을 연결해주는 내용은 그런 책들의 특징 중 하나이다. 지금까지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실행해왔던 것들이 옳지 않을 수도 있다는 관점은 우리를 환기시킨다.

이 책은 지금으로부터 약 10년 전 그러니까 2014년에 쓰여진 책이기 때문에 지금의 양상과 맞지 않는 부분들이 일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많은 생각할 거리들을 만들어준다. 또한 이 책은 디자인의 확장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현재에도 마케팅이나 시장조사를 통해 만들어지는 디자인이 가장 효율적이라고 여기는 사람과 학교들은 여전히 존재한다. 디자인의 의미가 끊임없이 확장하고 있는 이 시대에도 그런 방법론은 유효하다. 그러나 이 작가가 보는 좋은 디자인의 차원은 좀 다르다.

상업적으로 성공한 디자인이 모두 좋은 디자인은 아니라는 작가의 관점은 신선하다. 사실 디자이너들조차 디자인을 ‘상품’이라는 작은 카테고리 안에 가두고 디자이너의 활동을 산업활동이라는 범주 안으로 축소한다. 이에 대해 작가는 디자인을 상품으로 보는지 문화인류학적 대상으로 보는지에 따라 접근하는 방식이 전혀 달라진다고 말한다. 문화인류학의 대상으로 디자인을 관찰하면 그 범주는 넓어지고 디자이너의 활동은 사회적인 것이 된다. 우리는 ‘디자인의 영역을 단지 생산 활동 안에 가두려는 디자인 이론에 보다 비판적일 필요가 있다.’ (147p)

책의 제목이 말하듯 이 책은 인문학이라는 학문과 디자인이 어떻게 만날 수 있는가에 대한 책이다. 하지만 책장을 넘기다보면 이미 디자인에는 인문학적 가치가 녹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태생적으로 디자인은 그런 특징을 가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저자는 우리가 디자인의 범주를 좀 더 넓게 보고 인문학의 가치를 받아들임으로써 사회에 기여하는 방향을 권한다. 다른 것과 다른 것이 만나면 새로운 것이 만들어진다. 시야를 넓혀 확장의 가능성을 받아들이면 우리는 좀 더 넓은 곳으로 나아갈 수 있다.

[문장수집]
이런 상황에서 디자이너들은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이 되기가 쉽다. 게다가 실패란 있을 수 없다고 못 박는 기업의 요구는 디자이너의 태도를 보수적으로 만든다. 결국 검증된 길만을 걸으려 하는 소심함에 빠져들 수 밖에 없다. 이럴 때 ‘합리적’ 혹은 ‘과학적’이라는 표현으로 치장한 기계적 방법론들은 매우 유혹적이다. 그래서 오랫동안 한국의 디자이너들은 디자인 방법론이나 디자인 마케팅, 디자인 매니지먼트와 같은 해결책에 기대어 왔다. / 문제는 그것이 정말로 성공적이었냐 하는 것이다. 물론 이런 접근이 유효한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디자인의 비중이 높은 분야, 브랜드의 명성이 중요한 분야, 디자인으로 고부가가치를 얻는 분야에서는 그러한 방법이 크게 활용되거나 눈에 띄는 성과를 얻는 경우가 드물었다. 예컨대 명품 브랜드 샤넬 Channel의 제품들이 소비자의 취향에 대한 조사를 바탕으로 디자인된 것 같지는 않으며, 기계적 방법론을 적용하여 디자인했다는 흔적도 찾아보기 어렵다. 심지어 애플 Apple 같은 기업도 이제는 제품을 개발할 때 소비자 조사 데이터에 의존하지 않는다고 한다. / 14p
역량있는 디자이너나 기업일수록 이제는 기계적 방법론이나 객관적 데이터가 아니라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매력을 확보하는 데에 주력한다. 소비자는 ‘충족’시키면 되지만 인간은 그보다 더 나아가 ‘감동’까지 전달해주어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디자이너와 기업들이 예술을 찾고 인문학 서적을 뒤적거리게 된 것이다. / 16p
기능주의의 달고 단 열매는 생산자의 몫이었을 뿐, 디자이너의 것도, 소비자의 것도 아니었다. / 20p
따라서 문제는 노이즈 noise가 아니라 메시지 message 이다. 의미있는 메시지를 만들려면 디자이너에게는 마케팅이나 기호학이 아니라 보편적 인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러한 보편적인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학문이 바로 인문학이다. / 26p
심리학적으로 보면 명품을 선호하는 배경은 기호의 소비가 아니라 ‘자아 실현’에 있다. 이것은 인간의 욕구 중에서 가장 높은 단계의 욕구이다. / 32p
알렉산드로 멘디니가 디자인한 와인 오프너 패롯 Parrot, 앵무새 은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있는 유머러스한 감수성을 표현해 보편적인 관심과 사랑을 얻고 있다. 이런 디자인은 마케팅 기법이나 시장조사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취향을 통한 접근 역시 대중을 세분화된 소비자로 나눌 뿐이다. 훌룡한 디자인은 보편적인 사람과 만난다. 즉 디자인이 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그들을 매료시키기 위해서는 인간의 보편성에 기대면서 사회적 의미를 함유해야 한다. 그리고 이럴 때 매만지게 되는 것이 ‘인문학’이라는 카드이다. / 35p
우선은 해체주의 철학부터가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다. 그 탄생에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나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원리 등 과학의 성취들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해체주의 철학은 모더니즘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했던 고뇌에서 생겨난 하나의 경향이었으며, 모더니즘 역시 18세기 서양의 계몽주의 등 철학과 아이작 뉴턴 Isaac Newton의 물리학 같은 과학의 영향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의 사상 체계는 앞선 사상 및 과학과 단절적으로 볼 수 없다. 인문학의 모든 분야들은 유기체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다. / 37p
결국 하나의 건축 경향은 특정한 방법론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철학이나 과학 등 각종 인문학적 원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만들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건축을 비롯한 디자인은 그 자체로 하나의 인문학 덩어리이다. 철학과 역사, 심리학, 예술 등이 모두 하나로 녹아들어있는 디자인은 오래전부터 이미 인문학의 소산이었던 것이다. / 37p
20세기에 디자인이 기능성과 경제성을 중요시한 것은 사실이지만, 인간을 이해하고 인간의 본질과 연속성을 가지려는 시도 역시 적지 않게 해 왔다. / 40p
안타까운 사실은 이러한 아름다운 디자인에 대해 그간 우리는 기능을 챙기지 못한 ‘결핍된 디자인’으로 폄하해 왔다는 것이다. 디자인계에서는 이 같은 심미적 가치를 제대로 담을 수 있는 개념적 공간을 확보하지 못했다. 최근 들어 겨우 만든 것이 ‘감성’이라는 표현 정도이다. / 42p
결국 디자이너가 만드는 형태나 스타일이란 바로 시각화된 인문학이며 사람들은 여기에 열광하는 것이다. / 43p
시각적으로 화려하게 자극하는 부분은 없지만 어떤 이론적인 설명 없이도 아름답게 느껴진다. 전체적이 조화가 뛰어나기 때문이다. 시각적 자극을 동반하지 않고 순전히 디자인을 이루는 요소들의 상호 관계만을 통해 보는 사람의 눈과 마음을 쾌적하게 한다. 이런 형상이 아름다워 보이는 까닭은 감각이 아니라 정신의 결정에 달려 있다. 물질적 형상들이 일정한 정신적 경향에 의해 정리된 데에서 미적인 쾌적함을 느끼는 것이다. 그 쾌적함의 정도가 강할수록 깊은 안정감과 감동을 이끌어 낸다. / 43p
인문학자들이 글로써 자신의 통찰과 감동을 표현한다면, 디자이너들은 이를 색과 형태 및 그것들의 질서로써 표현한다고 하겠다 / 43p
디자인은 단지 물질세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해, 물질세계를 인문학적 우주관으로 구성하는 일이 디자인이다. 하지만 그동안 많은 기능주의자들은 물질세계를 만들어 내는 데에만 치중했다. 생산 단가를 낮추는 일에만 몰두했다며 기능주의를 ‘키치기능주의’라고 비판한 비평가 페터 바이스의 견해처럼, 기능주의는 디자인의 가능성을 물리적 차원으로 한정하고 기업의 이익을 겨냥하면서 그 인문학적 가치를 저해했다. 여기에는 작가가 자신의 의도를 자유롭게 표현하는 예술과 달리, 디자인은 대중의 복리를 책임져야 한다는 다소 자아도취적인 윤리관도 크게 작용했다. 말하자면 디자인은 디자이너 개인의 표현이 아니라 일반 사람들의 삶을 고양하는 지극히 이타적인 의무라는 생각이다. 이는 기능주의를 윤리적으로 상당히 미화애 왔고, 물리적인 기능 외의 가치에는 전혀 눈을 돌리지 못하게 해 왔다. / 54p
어떤 디자인은 시각적인 조화를 통한 아름다움을, 어떤 디자인은 아이디어를, 또 어떤 디자인은 세계에 대한 이해 또는 영혼을 흔들어 놓을 만한 감동으로 대중을 사로잡는다. 서로 다른 것 같은 이 모두를 우리는 ‘디자인’이라고 부른다. / 55p
특히 이곳의 교수이자 건축가 및 가구 디자이너였던 마스셀 브로이어 Marcel Breure는 재직 시절 역사에 길이 남을 만한 의자를 남겼다. 그 이름은 바실리 체어 Wassily Chair. 동료 교수이자 화가 바실리 칸딘스키 Wassily Kandinsky의 이름을 딴 것이다. / 58p
실제로 20세기에는 기술 또는 기능을 절대적이 자리에 올려놓으면서 결과적으로 나머지 가치들을 그에 종속되는 문제로 낮추었다. 특히 디자인 분야에서 기술은 필요충분조건인 것처럼 행세했다. 반면 아름다움, 윤리성, 가치, 철학 등은 있으면 좋고 없으면 그만인 것이 되면서, 디자인은 방황하며 21세기 초입을 겨우 맞이했다. / 65p
기술은 정보를 통해 습득할 수 있지만, 가치에 관한 부분은 통찰과 이해가 있어야 하고 인문학적 소양이 풍부해야 한다. 그래서 더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는 기술이라는 다소 쉬운 해결책에 기대어 회피해 온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디자인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이제 소비자라는 베일을 벗으면서 더 이상은 회피할 수 없는 상황이 되고 있다. / 70p
반대로 상업적으로 성공했다고 해서 모두 좋은 디자인이라고 할 수 없다. / 상업적인 성공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사실 홍보나 영업, 기술 등 디자인의 외부에 있다. 따라서 적어도 질적으로 좋은 디자인이 무엇인지 평가하려면 영화나 음악, 문학 분야에서처럼 내부 기준에 입각할 필요가 있다. / 71p
이 외에도 각종 사인 시스템 Sign System이나 폰트font, 공공시설의 CIP corporate image(Identity) program 같은 디자인 분야들은 상업적 영역과는 완전히 다른 영역에 존재하지만, 당당히 디자인의 한 부분을 차지한다. 어떠면 공공성이 강한 부분일수록 더욱 좋은 디자인이 필요한 것 아닐까. / 74p
철학에서 흔히 연구하는 주제 중 하나가 바로 존재이다. 그리고 오랫동안 서양은 존재성이 존재 그 자체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생각해 온 것 같다. 그러나 20세기로 넘어오면서부터는 존재는 그것을 둘러싼 여러 관계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논리가 힘을 얻고 있다. 상품에도 이 논리를 적용하면 매우 유용한 통찰을 얻게 된다. / 77p
게다가 상품이라는 것도 사실은 판매자의 관점에서 일방적으로 만들어진 개념이라 할 수 있다. 구매자는 상품을 산다기보다,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돈을 지불하고 확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구매자의 입장은 이런 점에서 매우 문화인류학적이다. 또 물건을 구입하는 순간부터 그것은 상품이 아니라 구매자의 삶을 조직화하는 문화인류학적 대상으로 바뀐다. / 77p
그러나 앞서 살펴본 대로 상품이란 일시적 관계에서 형성되는 특수한 상태일 뿐이다. 엄격히 이야기하자면 화랑에서 팔리는 순수미술 작품들도 상품이다. 나아가 모든 예술 분야가 상업적이라고 말해야 한다. / 78p
실제 질적으로 상당한 경지에 오른 디자인들은 대부분 경영학적 논리를 비껴가면서 영생하고 있다. / 81p
감성은 현대 과학과 기술이 가장 크게 의지하고 있는 인간의 합리성, 즉 이성의 반대말이다. 감성이라는 단어를 쓰는 순간 우리는 인간의 본질적 특징을 이성과 감성으로 나누는 이분법에 동의하게 된다. 하지만 임마누엘 칸트 Immanuel Kant의 인식론 이후로 감성이라는 개념은 잘 사용되지 않는다. 현대 철학에서는 인간을 이성과 감성이라는 단순 이분법으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 84p
2007년 밀라노 가구 박람회에서 디자이너 하이메 아욘 jaime Hayon 은 이탈리아의 타일 브랜드 비사자 Bisazza 의 전시 공간을 디자인해 선보였다. 픽셀 발레 Pixel Ballei 라는 주제를 내건 이 공간에서 아욘은 어마어마한 크기의 피노키오 조형물을 가운데에 놓고 그 주변을 자신의 작품을 체스판 위의 말처럼 배치했는데, 이것이 세계적인 관심을 끌어모았다. / 85p
이제 예술성은 디자인에서 매우 중요한 자산이 되고 있으며 디자인을 대하는 많은 사람들을 하나로 만들 수 있는 효과적인 자원이 되고 있다. / 87p
2부에서 알아본 것처럼 디자인은 기술과 상업성, 예술성과 더불어 만들어진다. / 88p
미술사학자 리스 카펜터 Rhys Carpenter 가 <그리스 예술의 미학적 기초 The Esthetic Basis of Greek Art> 에서 설명한 것처럼, 그리스 시대의 미술이 추구했던 아름다움은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황금 비율처럼 지식적 또는 수학적인 것, 인간의 감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미술은 일반 사람들이 접근할 수 없는 피안彼岸의 장소에 멀찌감치 자리잡았다. 중세를 지나 절대왕정 시대 전까지 이런 경향은 서양미술 전체를 지배했다. / 92p
그런데 18세기에 이르자 칸트가 예술을 인간의 내면으로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대상으로 바라보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부각한 것이 ‘형식’과 ‘내용’이다. 그는 형식은 예술의 겉모습이며, 내용은 예술에 담긴 보이지 않는 가치라고 정의했다. / 92p
그러다 보니 어떤 대상이 시선을 끄는 이유가 정말로 아름다워서인지 혹은 자극적이어서인지 잘 구분되지 않는다. 심지어 그저 자극적인 형태들이 좋은 디자인으로 오해받기 쉽다. 그러나 사실 조형적으로 완성도 높은 디자인은 눈을 자극하기 보다는 편안하게 한다. 자극적인 형태는 쉽게 식상해진다. 자극이 강할수록 감각은 쉬 피로해지는 것이다. / 99p
이러한 하나의 조형적 경향을 스타일 Style, 이라고 한다. 눈에 가장 먼저 보이는 요소인 형태를 한 꺼풀 벗겨 내면 스타일이 드러난다. 유명 디자이너의 디자인이나 시대의 어떤 사조를 대할 때 우리는 표피의 형태 뿐 아니라 일관된 경향을 보게 되는데 그것이 스타일, 또는 양식이다. / 102p
문화인류학에서는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서 만든 모든 것들을 ‘문화’라고 한다. 그중에서도 도구나 건축처럼 물질적인 것들을 가시적 문화 또는 문명으로 구분한다. / 108p
예컨대 디자인이 아무리 기능성만 추구한다고 해도 문화인류학적으로 보면 그것은 산업의 산물이 아니라 문화적 산물이다. 삶의 방식과 관련 있기 때문이다. / 108p
이 디자인은 편리함만을 도모하지 않는다. 인간이 사과를 깎는 새로운 문화인류학적 방식을 제시한다. 이처럼 기능성이 문화인류학적 차원으로 승화되면, 디자인은 산업에서 문화인류학의 범주로 진화한다. / 112p
이처럼 디자인 내부로 깊이 들어가면 대체로 인문학적 가치들이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단순한 기능성에서부터 삶의 방식을 새롭게 하는 것, 그리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 이르기까지, 다양한 인문학적 내용들은 뛰어난 디자인을 만드는 원천이 된다. 디자인의 그러한 성취는 다시 인문학적 가치들과 이어져 문화 발전에까지 크게 기여하고 있다. / 115p
그런데 구겐하임 빌바오 미술관을 디자인적으로 복기해 보면 중요한 점을 하나 발견할 수 있다. 결과가 좋긴 하지만 사실 이 건축물은 기능적이지도 않고 아름답지도 않으며, 비용 면에서 경제적인 것도 아니다. 만일 설계 단계에서 건축주가 합리성을 내세워 그에 타당한지만을 고려했다면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지어질 수 있었을까. / 프랭크 게리가 지은 스페인의 구겐하임 빌바오 미술관 / 122p
그리고 사람들의 삶과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영향력이 직접적이고 대단한 만큼, 그것을 만드는 디자이너들의 책임도 지대하다. 흔히 말하는 환경이나 사회적 분배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는 차원으로는 해결될 수 없다. 세상을 보다 총체적으로 이해하고, 자신이 속한 사회에 대한 유효적절한 대안과 희망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기량을 쌓아야 감당할 수 있는 책임이다. / 130p
화가와 조각가들은 수공예와 같은 실용적인 분야를 순수미술로부터 완전히 분리하려 했다. 여기에 대한 반발도 심하게 일어났다. 대표적인 예로 미술 공예 운동 Art & Craft Movement으로 잘 알려진 영국의 윌리엄 모리스 William Morris는 순수미술이 미술을 위한 미술만 추구한다며 강하게 비판했다. 그러면서 쓸모없는 것들만 만드는 순수미술보다는 대중을 위한 물건을 만들어 온 수공예를 비롯한 응용미술 분야가 순수하고, 도덕적으로 우월하다고 주장했다. 이런 생각은 현대 디자인이 출범하게 되는 이념으로도 자리 잡았고, 지금까지도 순수미술과 다른 디자인의 정체성으로 작용하고 있다. / 133p
디자인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디자인을 통해, 긍정적으로 말하자면 세상에 ‘기여’를 하고자 하고, 조금 부정적으로 말하자면 세상에 ‘훈수’를 두려고 한다. 그 과정에서 스스로 우월한 위치에 올라 세상을 내려다보기 쉽다. 하지만 세상을 디자이너 없이도 훌륭한 디자인을 많이 만들어왔다. 전문가들이 전혀 생각지 못했던 것들을 내놓아 때로는 디자이너들을 부끄럽게 하기도 한다. 세상이 만든 디자인은 무엇보다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따뜻하게 끌어안는다. / 141p
특히 앉는 사람의 엉덩이를 받치는 빨간색 좌석이 눈에 띈다. 이 부분은 카스틸리오니가 만든 것이 아니라 농업용 트랙터에서 떼어다 붙인 것으로, 이는 피카소나 다다이스트dadaist들이 많이 선보였던 콜라주 기법이다. / 아킬레 카스틸리오니가 디자인한 메차드로 의자 / 142p
개발의 붐은 한국의 도시들을 시멘트 숲으로 가득 차게 만들었다. 수직으로 뻗은 고층 빌딩들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시선을 본의 아니게 하늘로 향하게 했다. 하늘을 염원하는 시선은 원래 넓고 삭막한 땅에 갇혀 사는 사람들의 것이었다. 그래서 유럽과 아라비아 지역 사람들의 시선은 언제나 위를 향했다. 과거 우리는 머리 꼭대기의 하늘보다 앞뒤로 펼쳐진 강산을 보며 살아왔지만 빌딩 숲에 갇히면서 시선마저도 남의 것을 수입하게 된 셈이다. 수평적 시선을 잃어버린 채, 발이 닿아 있는 현실과 빌딩 꼭대기 세상과의 격차만을 확인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 144p
이처럼 디자인은 산업이나 사회의 달콤한 결과물만을 보여 주지는 않는다. 부조리한 면에 대해 쓴소리도 주저하지 않음으로써 사회 · 문화의 질적 발전에 커다란 역할을 한다. 따라서 우리는 디자인의 영역을 단지 생산 활동 안에 가두려는 디자인 이론에 보다 비판적일 필요가 있다. 설사 디자인이 생산 활동 내에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더라도, 아니, 바로 그 때문에라도 디자인은 좀 더 비판적인 태도로 기업을, 그리고 세상을 이끌고 바꿔나가야 한다. / 147p
조용하지만 메시지로 가득 찬 이 같은 디자인들은 사람들과 건강한 활력을 나누며 사회적 문제에 대한 처방전도 제시하고 있다. 이쯤 되면 디자인은 산업 활동이 아닌 사회 활동에 해당한다고 해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 달리 말하자면 이것은 디자인을 만드는 사람들이 산업의 역군만이 아니라 사회 활동가이자 세상의 근본을 사유하는 철학자로서의 역량을 갖추어야 한다는 압박이기도 하다. / 153p
디자인이 아니었다면 아마 이탈리아는 전쟁의 상흔과 그 후 1970년대의 정치·경제적 혼란에서 쉽게 빠져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 160p
디자인 내에서 ‘역사’는 ‘전통’이라는 말로 번역될 수 있을 것이다. 전통이란 역사적 흐름 속에서 추려진 가치이기에 미래를 비추는 자산이며 문화적 경쟁력의 바탕이 된다. / 160p
어느 시대의 어느 곳에서든, 서로 다른 문화가 만날 대 창조성은 극대화된다. 가우디의 파격적인 건축은 서유럽과 중동, 기독교와 이슬람교, 봉건시대와 현대가 격렬하게 교차했던 스페인 역사가 만들어 낸 것이다. / 스페인에서는 파격적인 경향의 예술가들도 많이 출현했다. 20세기의 대표적인 미술가 피카소와 달리가 이 나라 출신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 근래 들어서는 86쪽에서 본 타일 브랜드 비사지의 전시 공간에 거대한 피노키오 조형물을 설치했던 하이메 아욘이 디자인계에 활력을 더하고 있다. / 181p
디자인에서 전문 분야들은 병렬적으로 구분되어 있다. 이를테면 그래픽 디자인과 산업 디자인은 서로 동등한 분야로서 존재한다. 하지만 인문학의 여러 분과 학문들은 그와 같이 존재하지 않는다. 인문학을 구성하고 있는 분야들은 정확히 말해 평등하지 않다. 가치에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관계에 있어서 그러하다. / 공학에 대해서 자연과학이 갖는 위상처럼, 인문학의 여러 분야들은 본질적인 분야와 응용 분야로 위계를 구성한다. 그리고 이 관계는 매우 중층적이다. ‘서로 위계 관계를 이루는 학문 분야의 덩어리’, 이것이 인문학을 가장 잘 표현한 말이라고 할 수 있다. / 187p
앞서 말했듯 인문학은 분과 학문들의 종합 선물 세트가 아니라 위계가 있는 유기적인 체계이다. 따라서 가장 먼저 그 체계부터 파악해야 한다. / 인문학에서 가장 큰 바탕을 이루고 있는 분야는 바로 철학이다. 철학은 세상을 보는 근본적인 틀을 고민하고 그에 대한 관점을 마련한다. 그러한 관점은 여타 인문학 분야들에 영향을 미치고, 각 분야들은 그것을 자양분으로 발전한다. 단순하게 보면 인문학의 여러 분과 학문들은 철학을 기둥으로 하여 서 있는 건축물이라고 할 수 있다. / 물론 각 학문 내에도 소규모의 위계가 있다. 예컨데 경영학과 경제학의 관계처럼, 기초 학문과 응용 학문이 각각 상위와 하위에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응용 학문, 즉 하위 분야가 본질적인 원리와 거리를 둔다는 의미는 아니다. 응용 학문은 구체적인 실천과 관련이 있다. / 예술은 인문학의 체계에서도 가장 위쪽에 위치한다고 할 수 있다. 각종 인문학들이 종합되어 실천되는 지점이다. 그래서 예술에는 예술가들의 주관적 표현만이 아니라 인간의 보편성을 표현해 감동을 주는 가치가 담긴다. 디자인도 예술과 비슷한 지점에 놓여 있다. / 189p
디자인 안에서 순수미술을 어떻게 생각하든, 사실 디자인은 이미 오래전부터 순수미술 분야와 영향을 주고받고 있었다. 제 2차 세계대전 전까지만 하더라도 오히려 두 분야는 쌍둥이 같았다. 예컨대 검은색을 중심으로 심플함을 추구하는 샤넬의 패션 디자인이나 바우하우스의 미니멀한 그래픽 디자인은 당시의 신조형주의 Neo-Plasticism 회화나 러시아 아방가르드 회화와 거의 동일한 조형성을 추구했다. / 192p
한편 알렉산드로 멘디니는 디자인이 예술이 아니라는 인식이 팽배했던 시기부터 이미 그런 논란에서 자유로운 작업을 해 왔다. 1978년에 선보인 디자인으로 그의 주요 작품이기도 한 칸딘스키 의자는 아예 러시아 아방가르드 회화의 대표적인 인물인 바실리 칸딘스키에서 이름을 따왔다. / 196p
앞서 말했듯 원래부터 디자인은 순수미술의 변화와 거의 대부분 발을 맞추어 왔다. 이를테면 모더니즘이나 포스트모더니즘 같은 디자인 경향이 바로 그 증거이다. 제1, 2차 세계대전 전후로 서향을 지배했던 모더니즘은 사실 순수미술 등 예술분야를 중심으로 나타났던 흐름이다. 엄밀한 이성과 유물론을 바탕으로 한 모더니즘 예술은 주로 네덜란드 신조형주의나 러시아 아방가르드 회화를 중심으로 기하학적 스타일을 형성했고, 그것은 곧 기능주의를 최우선으로 하면서 역시 기하학적 형태를 주조로 하는 모더니즘 디자인에 영향을 미쳤다. / 1980년대 이후로 등장한 포스트 모더니즘 역시 영화, 팝아트 등의 예술분야와 유사한 조형적 성향을 추구하면서 세계 문화를 주도했다. / 199p
수력발전소가 전기를 생산하는 것은 자립적인 일이지만 예술품은 다르다. 반드시 받아들이는 사람을 전제로 하며, 예술적 가치와 감동을 동반한다. 예술은 문화적 가치를 매개하는 촉매이며, 사회적 수용 과정을 통해 완성된다. 따라서 예술은 존재론적 접근보다는 관계론적 접근, 즉 창작자 및 수용자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모든 예술적 가치들은 이런 과정과 관계 속에서 만들어진다. / 206p
가장 설득력 있는 것은 당시 독일의 지성을 이끌었던 논리실증주의의 영향이다. 논리실증주의는 바우하우스가 문을 연 때와 거의 비슷한 1920년대에 오스트리아 빈에서 등장한 실증주의 철학으로, 모든 형이상학은 무가치하며 과학적 지식만이 중요하다는 입장이다. 그 핵심은 일체의 감수성이 개입되지 않은 ‘이성’과 ‘물질’이며, 이성은 인간이고 물질은 자연이었다. / 218p / 이는 일체의 개인적 감수성을 부정하고 재료의 합리성과 생산의 경제성만을 추구한 바우하우스의 디자인관과 매우 흡사하다. / 219p
해체주의 Deconstruction 는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메리다가 주장한 개념이다. 그는 2천년 넘게 내려온 서양의 로고스 logos, 즉 이성을 중심으로 한 사유방식을 근본적으로 비판하며 그것을 해체함으로써 대안을 찾으려 했다. 디자인에서 모더니즘의 한계가 명백해지고, 포스트모더니즘 역시 흡족한 대안을 내놓지 못하고 상업주의와 쉽게 결탁하던 때에 모든 것을 부숴버리고자 한 데리다의 철학은 많은 건축가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 221p
결국 이 우주는 기계처럼 움직이지도 않으며, 이성을 기반으로 한 과학으로는 우주의 진리를 밝힐 수 없게 된다. 현대 과학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확률적 지식뿐이라는 것이 불확정성원리의 핵심이다. 이것으로 서양의 모든 사고방식은 근거를 잃는다. 자연히 디자인에서도 기능주의나 기계 미학의 근거들은 든든한 배경을 잃게 되었다. / 24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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