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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균 [모던 데자인_계몽과 광기의 역사] 책 리뷰

by ianw 2025. 7.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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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균 _ 모던 데자인_계몽과 광기의 역사 _ 이유출판 _ 예술 대중문화 _ 디자인 _ 색채 _ 디자인이론 _ 디자인기본]

 

 


김종균 저자는 서울대학교에서 디자인학 박사, 충남대학교에서 법학 석사, 런던 킹스턴대학교에서 큐레이팅 전공으로 예술학 석사 학위를 받았고, 현재 특허청에서 심사관으로 근무하고 있다. 오랫동안 한국의 예술과 디자인, 시각문화에 대한 비판적인 연구를 해왔다. 저서로는 [한국의 디자인], [디자인 전쟁], [바우하우스], [Encyclopedia of East Asia Design], [History of Design and Design Law] 등이 있다. / 저자소개 중 / 

 

모던 데자인 계몽과 광기의 역사 책


모든 일에는 밝은 부분과 어두운 부분이 동시에 존재한다. 또한 어떤 사건들은 독립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을 넘어 다른 일들과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다. 현재는 과거와, 미래는 현재와 분리되어 있지 않다. 우리는 보통 그런 연결의 고리들을 정리하고 이해한 사람을 전문가라 부른다. 전문가가 되려면 많은 정보를 습득하고 오랜 시간 연구를 거듭해야 한다. 이 책은 그런 전문가가 무엇을 하는지 잘 보여주는 좋은 결과물 중 하나다. 

 

모던 데자인 계몽과 광기의 역사 책


작가는 오랜 연구를 통해 수많은 디자인 서적들이 서구의 이론만 되풀이한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밝은 면만 되풀이되는 한국의 디자인사에 어두운 면도 들추려는 작가의 노력이 존경스럽다. 작가는 또한 이 책이 현대미술과 건축, 디자인을 균형 잡힌 시선으로 바라보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글을 써 내려갔다고 한다. 덕분에 나는 이 책을 통해 많이 배웠고, 아직 균형을 잡진 못하지만 새로운 관점들을 획득했다. 

 

모던 데자인 계몽과 광기의 역사 책


고대로부터 시작해, 중세, 근대를 거치면서 예술의 대상이 대중으로 확장된다. 디자인의 역사라는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한 여정이다. 우리는 작가가 안내하는 길을 따르면서 균형 잡는 법을 배워간다. 다행히도 그 길에는 즐거운 것들도 포함되어 있는데, 예를 들면 현대에 약을 부르는 명칭의 기원이 미켈란젤로를 후원했던 메디치Medici가의 이름이었다는 것 이라던가, 아르누보가 어떤 하나의 스타일이 아니라 특정시기에 나타난 반역사주의의 묶음이라는 것, 또는 러시아에 바우하우스와 유사한 교육과정을 가지고 있었던 브후테마스라는 기관이 있었다는 것과 같은 새로운 정보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모던 데자인 계몽과 광기의 역사 책


어떤 현상에는 그 현상이 일어날 수 밖에 없는 배경이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에는 디자인에 관한 것들만 담겨있는 것이 아니다. 사회와 문명의 발전, 이성과 과학, 사상들과 함께 그 안에서 서로 섞이며 외부로 확산하는 합리와 모순과 질서와 혼돈이 담겨 있다. 

 

모던 데자인 계몽과 광기의 역사 책


방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한 작가의 노력과 능력이 놀랍다. 나는 이 책을 일부러 더 천천히 읽고 싶었고, 실제로도 그렇게 했다. 그 이유는 장과 장 사이에서 머무르고 사유하면서 내 기억속에 오래 남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 그래서 맨 아래에 수집한 문장들도 다른 책에 비해 많은 편이다. 이 글을 보시는 분들은 양해해주시기 바란다. 다시 읽고 싶은 문장이 많아서 어쩔 수 없었다. / 

 

모던 데자인 계몽과 광기의 역사 책


이 책을 읽으며 알 수 있었다. 나는 역사를 좋아하는구나. 이렇게 좋아하는 것들을 알게 해주는 것이 책의 좋은 점이라 생각한다. 디자인과 관련이 없는 역사도 좋아하는지는 다음에 다시 실험해봐야 할 것 같다. 디자인이라는 분야에 관심이 있거나 이미 몸을 담고 있는 사람들 모두에게 추천한다. 기존의 디자인 역사를 다룬 책들과는 다른 점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며, 이미 알고 있던 것들에 대해서도 새로운 관점을 획득할 가능성이 높다.

 

모던 데자인 계몽과 광기의 역사 책


그리고 책을 덮는 순간 이 책의 부제가 왜 ‘계몽과 광기의 역사’인지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문장수집]


세상 모든 역사가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이 있는데, 한국의 디자인사엔 밝은 면만 남아서 지면을 채우고 있었다. / 11p


세상 모든 것은 신에게 봉사하기 위해 존재했고, 예술은 신에게 봉사하는 것을 사명으로 삼았다. 신에게 봉사하는 장소는 건축이고, 신을 찬양하는 것이 음악이며, 신을 기쁘게 하는 선물이 예술이다. / 14p


예술을 관통하는 핵심 논쟁은 이분법이다. 이분법은 집요하게 이데아와 현실, 실존과 본질, 장식과 기계 생산 논쟁이 유럽의 예술을 집어삼켰고, 신과 권력에 봉사하던 예술은 근대 기계 생산의 시대를 맞으며 가까스로 독립했다. / 14p


이 찬란한 예술을 콘스탄티노플의 옜 이름 비잔티움에서 이름을 따 ‘비잔틴 미술’이라 부른다. / 20p


500년경을 지나면서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한 이후 1500년대에 이르기까지, 천 년간 유럽의 예술은 암흑기였다. / 22p


교회가 유럽 전체를 뒤덮자 금욕적인 생활을 강조하여 화려한 성당 대신 작고 초라한 성당을 짓기 시작했다. 로마의 기독교가 정복한 세상에 지어진 건축과 예술양식을 로마네스크 Romanesque 양식이라 부르는데, 로마의 영문 Romanrhk 양식을 의미하는 Esque의 합성어이다. / 23p


그로테스크 Grotesque란, ‘동굴’을 의미하는 이탈리아어 ‘그로테 Grotte’에서 왔다. 여기서 그로테스크란 보기가 민망할 정도로 기괴하고 찌그러져 있고 슬퍼 보이며 무섭다는 말이다. 그래서 종종 중세의 미술을 그로테스크 양식이라고도 부른다. 중세의 예술은 오늘의 예술과는 전혀 다른 목적으로 만들어지고 소비되었기에 아름다울 이유가 없었다. / 중세 교회에는 사랑의 하느님이 없었다. 애당초 사랑이라는 개념 자체가 근대의 발명품이다. / 26p


12세기가 되자, 로마네스크 양식에 싫증이 난 사제들은 하늘을 우러러 본다는 의미를 담아 고딕 양식이라 불리는 높고 크고 밝은 건물을 짓기 시작했다. 고딕은 ‘야만적’이라는 의미로 고대 고트족처럼 야만적이라고 낮잡아 표현한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 27p


중세의 교회는 이슬람 사원(모스크)과도 여러모로 유사하다. 이슬람 사원도 신을 본뜬 형상이나 그림을 우상으로 보아 금지한다. 그림을 못 그리니까 신의 이름을 큰 글씨로 쓰는데, 글씨가 곧 신이므로 금박을 입히고 최대한 멋지게 쓰다 보니 캘리그라피(붓글씨)가 화려하게 발전했다. 특정한 대상을 재현한 그림을 그릴 수 없으니 기하학적인 도형이나 식물 넝쿨 같은 문양만 그리는데, 문양의 표현이 신의 경지에 다다랐다. 이를 ‘아랍의 문양’이라 하여 ‘아라베스크 Arabesque’라고 부른다. 글씨와 문양이 곧 신의 모습이다. 이 역시 관념적인 예술이다. / 35p


십자군 전쟁은 아랍에 잘 보존되어 있던 고대의 지식과 아랍의 문명, 자연과학을 유럽에 전파하는 계기가 되었다. 십자군 원정 실패로 기독교의 권위는 무너지기 시작했고, 1500년대 유럽의 예술이 부흥하는 계기를 만들었으니 그 유명한 르네상스 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르네상스 Renaissance는 ‘다시 태어난다’는 뜻의 라틴어로 ‘고대 그리스 정신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하는 움직임이다. / 36p


망해가는 교회들은 앞다투어 리모델링에 나섰고, 건축들은 천장을 뚫은 듯한 그림들로 채워지고, 살아 있는 듯한 화려한 대리석 조각이 세워지며, 성당 속에 영원한 생명이 담겼다. 바야흐로 르네상스 재건축의 시대였다. / 40p


장식이 극에 달하는 시기는 18세기로, 귀족들이 왕의 궁궐 장식보다 더 화려한 장식을 추구하면서 로코코 양식이 등장한다. 로코코는 후기 바로크라고도 부를 만큼 구분이 힘든데, 우아하고 화려한 장식이 많다면 바로크이고, 그것이 지나칠 정도라면 로코코라고 생각하면 대충 맞다. / 55p


예술이 권력에서 떨어져 나와 각자 제 갈 길을 찾기 시작한 것은 1800년대 후반, 왕이 쫓겨나고 시민사회가 탄생하면서 부터이다. 물건이 계급과 상징에서 분리되어 그저 물건일 수 있었던 것은 중세의 질서를 깨트린 계몽주의의 영향이다. / 59p


1800년대 중반, 유럽이 근대사회로 진입하면서 사회 문화 전반에 새로운 시대를 대표하는 근대주의 양식, 즉 모더니즘이 등장했다. 모더니즘이란 무엇인가? 서양 사람들은 무슨 무슨 주의 ~ism라는 말로 특정한 현상을 정의하기를 좋아한다. ‘주의主義’라는 말을 풀어보면, ‘중심(주인) 주主’자에 ‘뜻 의義’자로 구성되어 있다. / 59p


서양의 역사는 크게 고대와 중세, 근대로 나뉜다. 역사를 기록하기 시작한 때로부터 기독교가 국교로 공인되기 전인 5세기까지가 고대이고, 기독교가 유일한 종교로 세상을 지배하던 15세기까지를 중세라 한다. 근대는 종교가 무너지고 르네상스가 진행된 중세 이후를 말하며 대략 16세기부터이다. / 60p


그러면, 왜 프랑스 혁명이 근대사회를 규정하는 중요한 기준인가? 근대성의 기본 전제인 평등을 이루었고, 주체적이고 자유로운 개인을 탄생시켰기 때문이다. 개인의 합리적인 의심을 바탕으로 모순되고 부조리한 것을 올바르게 개선하려는 것이 근대성의 기본 정신이자, 근대 사회의 가장 중심되는 특성이다. / 70p


다만 구시대의 모순은 타파되었지만, 새로운 시대의 더욱 크나큰 모순은 민중의 삶을 철저하게 유린하였다. 노동자들은 문제의 원인이 기계에 있다고 생각하여 기계파괴운동을 벌이기도 하였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영국의 ‘러다이트 운동 Luddite Movement’이다. 하지만 기계화와 자본주의의 성립은 대세이자 시대정신이고, 거스를 수 없는 변화였다. 한편, 노동과 자본에 대해서 고찰한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자본주의 사회의 근원적인 모순을 밝혀내면서, 노동운동과 사회주의 사상을 전개하였다. 또한 열강들은 시장 확대를 위한 제국주의 전쟁을 본격화하였다. / 73p


섬유 판매의 부진은 영국 국력의 약화를 의미했다. 영국 정부는 불황 타계를 위해 미술가를 산업계에 투입했다. / 75p


박람회는 왕과 나의 물건이 따로 있지 않은 시대, 즉 물건 혹은 예술이 민주화된 시대를 알리는 행사였으며, 세상이 근대사회로 전환되었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박람회장은 전근대사회에서 근대사회로 전환되는 경험을 물건이라는 매체를 통해서 제공했다. / 80p


이 시대에 과거를 그리워한 사람들은 과거로 돌아가자고 주장하며 몇백 년 지난 장식 양식, 예컨대 고대 그리스부터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로코코 양식을 무작위로 끌어와서 재현했는데, 이런 건축과 물건들을 ‘신바로크’, ‘신로코코’라고 불렀다. 과거를 회상하고 동경하는 경향을 통틀어 신고전주의라 하는데, 사실 신고전주의는 르네상스 이후로 늘 있던 경향이다. / 82p


우리나라 1960~1970년대에는 전통 건축물을 흉내 낸 콘트리트 건물들이 많이 지어졌다. 가령 국립민속박물관이나 현충원, 청와대, 독립기념관 등과 같은 관공서들에서 거대한 기와지붕과 전통 목조기둥 양식을 본뜬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이 한국판 신고전주의이다. / 85p


윌리엄 모리스는 디자이너이자 소설가, 번역가 사회주의자인데, 결정적으로 부유한 중산층이었다. 윌리엄 모리스는 경사스러운 런던 만국박람회에 전시된 기계 생산품을 보며, 기계가 세상을 타락시켰다고 생각했다. / 85p


예술이 더 이상 누군가에게 바치는 것이 아니고, 특정한 계층만 향유하는 것이 아니라고 선언한 셈이다. 예술을 통해 개인의 행복을 찾자는 말을 했다면 도가나 장자 수준의 신선놀음으로 그쳤을 텐데, 사회를 변혁시키자고 했으니 사상가라 할 것이다. 또 주장에 그치지 않고 현실 개혁을 실천으로 옮긴 활동가로서, 그는 이후 펼쳐질 근대 디자인운동에 큰 귀감이 되었다. 비록 작가로서 활동은 크게 주목받지 못했으나, 예술 사상가로서 그가 끊임없이 회자되는 이유이다. / 90p


반면, 상류층 귀족과 부르주아들의 생활은 화려했다. 1850년대에는 식민지의 확장과 함께 유럽이 부흥하고, 1870년대 들어서는 최고로 풍요로운 시기를 맞았다. ‘벨 에포크’ , ‘아름다운 시절’이라고 부르는 시기는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 지속되었다. (1870~1914) / 92p


1800년대 중반, 가난하고 ‘덜 배운’ 예술가, 소위 인상파 미술가들이 등장했다. / 대표적인 인상파 화가로는 모네, 마네, 피사로, 르누라르, 드가, 세잔, 고갱, 호그 드이 있다. / 주석 / 101p


메디치가는 약을 팔아 돈을 많이 벌었는데, 현대의 ‘약’이라는 영어 단어 Medicine 어원이 메디치 Medici일 정도로 메디치 가문은 당대 최고의 집안이었다. / 101p


서양의 것은 무엇이든 환영받고 ‘모던’이라는 말을 좋아하던 일제강점기에, 제한된 정보로 서양=의 화풍을 접한 화가들은 인상파의 화법을 추구했다. 그래서 한국 근대 회화에서 고전주의는 찾아보기 힘들고, 김환기, 이중섭이나 박수근의 그림들에서 야수파의 그림자와 피카소가 느껴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일제강점기에는 컬러 인쇄술이 없어서 인상파 화가들이 원색을 즐겨 쓰는지는 잘 몰랐던 것 같다. / 105p


인상파는 빛을 중요시했다. 빛은 왜 중요한가? 빛은 전통적으로 신의 상징이었지만 계몽주의 사상의 상징이기도 했다. 유럽인은 눈에 보이지 않는 신이나 악마를 믿던 전근대 시대를 암흑으로 표현했는데, 이 암흑을 걷어내는 것이 빛이다. 중세가 밤이라면, 계몽주의 시대는 동이 트는 새벽이다. / 110p


감수성 예민한 인상파 화가들에게 자연과 민중은 중요한 화두였고, 자연을 예찬하고 민중을 즐겨 그리는 낭만주의가 유행했다. 낭만주의는 고전주의에 대립되는 개념이다. 볼 수도 없는 천사를 그리느니, 눈앞의 이웃 주민을 그리는 것이다. / 이성적이고 객관적인 것보다 감정과 주관을 우선한다. 고전주의가 카메라와 같은 수동적인 회화라면 낭만주의는 능동적인 회화, 작가 자신이 스스로 창조해 나가는 회화라 할 것이다. / 113p


당시 비평가들은 이들의 독특한 그림을 한데 묶어 “참 인상적입니다.”라며 비아냥거렸는데, 이것이 ‘인상파’라는 이름으로 굳어져 버렸다. 지금은 인상파라고 하면 멋있어 보이지만, 원래 혐오의 표현이었다. / 116p


한편 후기 인상파는 세상이 원하는 그림 대신, 자기의 생각과 꿈을 그렸다. 세상을 반영하거나 설득하거나 반항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바깥 세상에 관심을 끊고, 자신의 내면으로 파고들어가 유미주의, 즉 오직 미의 본질만을 탐구했다. 그리고 미술가들만을 위한 미술, 일반인이 이해하기 힘든 엘리트 예술을 추구하는 경향이 등장하였다. / 119p


이브의 사과는 인류를 실낙원에서 쫓겨나게 했고, 뉴턴은 만유인력을 발견하여 자연과학과 계몽주의의 시작을 알렸다. 세잔의 사과는 현대미술을 어렵게 만들고 엘리트 미술으 faksems 출발점이다. 1870년대 이후,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고 그림이 어렵게 느껴지게 만든 사람이 세잔이다. / 120p


그런데 세잔은 미술이 더 이상 사회와 도덕성을 추구할 필요성이 없으며, 예술을 위한 예술, 미술을 위한 미술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술을 미의 관점에서만 보고 아름다움만 추구하겠다는 주장으로 유미주의, 탐미주의, 심미주의  등으로 부르지만, 어쨌거나 관객은 안중에 없는 도발이었다. / 121p


이들은 자기가 그리고 싶은 것을 자기 마음대로 그렸으니, ‘표현주의’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 오늘날 인상파 미술가들은 미화되어 있다. / 주석. 표현주의 : 정서적 효과를 위하여 생채와 형태를 과정하고 왜곡하는 미술 사조이다. / 125p


후기 인상파를 마무리 짓는 대형 스타는 단연 피카소이다. 사실 피카소를 앞서 인상파 화가들과 묶기에는 시기적으로 차이가 난다. / 피카소는 피카소이고 굳이 유형을 나누자면 인상파모다는 큐비즘 Cubism 작가이다. / 우리말로 ‘네모주의’가 어떨까 싶지만, 어쨌거나 이미 오래전부터 입체주의로 번역되었다. / 126p


이전 인상파의 작업은 비록 각자 스타일이 달라도 눈을 통하여 받아들여진 감각의 세계를 인정한 반면, 세잔부터는 외부의 세상에 자신의 정신적 사유와 이성적인 합리주의를 더했다. 즉 보이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새롭게 세상을 재조합해 냈다. 피카소는 이러한 변화에서 한 단계 나아가 하나의 대상을 전후, 좌우 각도에서 바라보고, 그 모습을 기하학적인 형태로 분해하며, 분해한 요소들을 화면 위에서 재조합해 놓았다. / 대상을 최소한의 기하도형으로 분해해서 재조합하는 것이 큐비즘의 특징이자, 1910년대 아방가르트 작품의 특징이기도 하다. 입체파는 무엇을 재현할 것인지에는 관심이 없었다. 재현이란 사회를 반영하는 것, 대상을 화면에 옮기는 것을 말한다. 큐비즘 작가들은 무엇을 그릴 것인지에는 관심이 적은 대신, 어떤 식으로 화면을 구성할 것인지에 더 관심이 있었다. 여기서 중요한 부분은 ‘구성’이다. 구성은 영어로 composition이고, 배치 등을 의미하지만, 문맥상 재조합이라고 불러야 좋을 것이다. 구성의란 화면 내에 조형 요소들을 임의로 배치하여 “어떻게 하면 화면 그 자체로서 완벽한 아름다움을 만들어 낼 것인가?”를 고민한다. 대상과 그림과의 관계를 끊어 버린다. 이제 그림은 세상의 완전무결한 재현이라는 임무를 버리고, 스스로 독립적이고 완벽한 상태의 그림으로 재탄생하고 있었다. / 127p


이는 근대의 혁명이 추구하는 지향점과 같았고 그렇기에 인상주의는 혁명의 정신을 공유한 작품들이라 할 것이다. / 130p


그래서 근대의 이상을 잘 실현한 일련의 노력과 작업에 대해서 ‘모던’에 ‘이즘’을 붙여서 ‘모더니즘’이라고 부른다. 인상주의는 회화의 모더니즘이다. 그런데 모더니즘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앞서, 르네상스 미술도 중세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모더니즘이라고 했지만, 이때는 소문자 ‘m’을 써서 ‘modernism’으로 표기하고, 일반명사로 이해된다. 르네상스 이후의 모든 양식을 모더니즘이라 불를 수 있는데, 인상파의 모더니즘은 그 이전의 모더니즘과 차이가 있고 성취한 바가 크기 때문에 대문자 ‘M’을 쓴 ‘Modernism’으로 표기하고 고유명사로 쓰인다. 즉 회화에서 모더니즘은 곧 1850년대 이후 인상주의를 말한다. / 130p


에펠탑은 전통을 거부하고 변화하는 미래를 기계의 언어로 표현한 조형물이었다. / 134p


계몽주의는 진보주의이기도 하다. ‘진보 進步’란 ‘과거로부터 미래로 한 걸음 더 나아간다.’는 뜻이며, 나아가는 과정에 일어나는 기득권의 반감을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사실 인류 역사상 기득권은 언제나 변화를 달가워하지 않았지만, 역사는 결국 퇴행이 아닌 진보를 선택했다. / 135p


아르누보 Art Nouveau(1890~1905년경)란 영어로 ‘New Art’라는 뜻으로 과거의 양식에서 벗어난 새로운 양식, 새로운 미술을 말한다. 19세기 회화의 대표가 인상주의라면, 상업미술에서는 아르누보가 대표적이다. 인상주의와 아르누보는 현대에 와서는 회화와 디자인으로 구별되지만, 당시까지는 구분되지 않을 만큼 연결되어 있었다. / 주석 : 아르누보는 1895년 개점한 사무엘 빙 Samuel Bing의 미술품점 L’art Nouveau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고딕과 신고전주의에서 볼 수 없었던 곡선의 장식으로 신흥계급의 부르주아와 결부하여 종합미술이자 대중적 지지를 통해 전 세계적인 미술운동으로 발전한 최초의 모더니즘 양식이다. / 135p 


아르누보 디자인은 일상의 모든 물건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종합예술이고, 귀족보다는 일반인이 선호했던 대중적인 예술이며, 세계적으로 유행한 탓에 최초의 모더니즘 디자인으로 불린다. 워낙 널리 퍼져서 국가별로 아르누보 양식을 부르는 이름도 제각각이었다. 영국과 미국에서는 아르누보라 불렀지만, 독일은 유겐트 스틸이라 불렀다. 유센트 jugent는 ‘젊음, 청춘’이고 스틸stil은 ‘스타일’이라, 우리말로 ‘청춘 양식’이라 한다. 나이 든 고전주의 대신 새로 태어난 양식이니 청춘이라는 의미이다. 프랑스에서는 엑토르 기마르 Hector Guimard라는 작가가 아르누보 양식 표현에 탁월한 솜씨를 보여서 그의 이름을 따서 ‘기마르 양식’이라고 불렀다. / 이탈리아에서는 ‘리버티 양식’이라 불렀다. 리버티 Liberty는 ‘자유’이며, 과거의 억압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양식이라는 뜻이다. 오스트리아에서는 ‘시세션 secession’이라 불렀다. 영어로 ‘섹션 section’은 ‘자르다, 분리하다’는 뜻으로 과거의 역사에서 분리되었다는 뜻으로 ‘분리파’라고도 번역한다. 빈을 중심으로 발전한 탓에 ‘빈 분리파’로 알려져있다. 아르누보를 부르는 이름은 달라도, 그 뜻은 대게 중세와 봉건제를 벗어나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인상주의처럼 아르누보도 고전주의를 극복하려고 노력했고, 역사를 부정했다. / 139p


그러니까 새로운 장식을 채택하건, 장식 자체를 없애건 간에 과거 고전주의를 거부하는 흐름은 모두 아르누보이다. 아르누보도 인상파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스타일이 아닌, 특정 시기에 나타난 반 역사주의 움직임의 묶음으로 해석할 수 있다. / 142p


아르누보는 곧잘 과도한 곡선 무늬를 사용하여 환상적이며 쾌락적이라 평가할 정도로 화려한 장식 예술이었고 이는 기계 생산의 시대에 역행하는 것이었다. 장식은 풍요로운 시대의 전유믈이며, 1910년대 전 유럽이 전쟁에 돌입하면서 아르누보는 어둡고 침울한 시대적 변화를 이겨내지 못했다. 물론 아르누보 운동이 모두 실패한 것은 아니어서, 제 1차 세계대전 이후 아르데코라는 새로운 양식으로 승계되었다. 한편 빈 분리파 건축이나 매킨도시의 가구작품과 같이 장식을 제거한 아르누보 전통은 현대 디자인에 큰 영감을 주었다. / 146p


한쪽은 아르누보와 같은 장식을 옹호하여, 기계의 이미지를 작품 소재로 받아들이려 했다. 다른 한편에서는 기계의 이념인 기능주의를 예술에 접목하여, 기능과 관련이 없는 장식을 부정하고 제거하려 하였다. 전자는 기계가 생산될 법한 느낌의 직선, 사각형, 원 등을 이용하여 장식하는 경향으로 발전해 프랑스와 미국 등지에서 아르데코라는 장식 운동을 촉발했다. 후자는 기계 생산의 효율을 강조하며 물건의 비합리적인 부분을 모두 제거하는 반장식 운동으로 발전하였고 독일, 러시아 등지에서 크게 확산하였다. / 147p


1880년대에서 1900년대 초까지 활약한 많은 건축가들이 오늘날 철골구조와 커튼월, 엘리베이터로 구성되는 현대 고층빌딩 건축 양식의 원형을 만들어 낸 ‘시카고 학파 Chicago School’로 통칭되었으며 아직도 그 명성이 자자하다. / 159p


미국 건축가, 루이스 설리번 Louis H. Sullivan (1856-1924)은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 Form follows function” (1896) 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고, 이 말은 21세기 디자인의 정신이 되었다. / 159p


헨리 포드는 자동차가 비싸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고 생각했고 “자동차를 민주화하겠다”라고 선언했다. 민주화란 모든 사람이 똑같은 권리를 가진다는 의미로 근대기에 혁명을 통해 피 흘려 쟁취한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 / 161p


독일공작연맹의 슬로건은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양식을 찾는 것”으로 아르누보와 비슷하지만, 예술 차원의 양식 논의가 아니라 국가 산업 발전을 목표로 삼은 예술.산업 총력전이라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 167p


흡사 인상파 예술가들이 민중 혁명의 중심인 파리로 모여들고, 많은 산업가들이 미국으로 건너가 변혁을 일으켰듯, 독일은 개혁적인 예술가들에게 산업과 예술을 접목시키는 새로운 실험의 장이었고, 독일 공작연맹은 역사 발전의 이정표를 세우고 현대 건축과 디자인사의 주요 작가들을 배출해 냈다. 산업화에 열중하는 독일의 분위기는 젊고 유능한 해외 건축가들에게 보편적 예술의 가치를 추구하는 아방가르드Avnat-garde의 실험 무대이자, 국경을 초월하여 새로운 미래 청사진을 그릴 세계주의적 환경을 제공하는 기회의 땅처럼 느껴졌다. 독일 건축가 페터 베렌스 Peter Behrens(1868-1940), 벨기에 건축가 앙리 반 데 벨데, 오스트리아의 건축가 요제프 마리하 올브리히 Joseph Maria Olbrich(1867-1908) 등이 독일공작연맹 활동을 주도했으며, 뒤늦게 발터 그로피우스도 참여하였다. / 170p


그로피우스의 개인적 불행은 그가 이후 설립되는 바우하우스라는 학교에 집착하며 혁신적인 디자인 활동에 매진하는 배경이 된다. 바우하우스는 독일공작연맹의 확장이라고 볼 수 있으며, 근대 건축이 완성되고 디자인이라는 장르가 탄생하는 배경이기도 하다. / 177p


기계와 기계 생산품 그 자체가 아름다울 수 있다는 인식, 즉 기계미학의 가능성을 확인시켜준 곳이 독일이고, 이는 독일공작연맹의 노력 덕분이었다. 페터 베렌스는 기능 그 자체가 아름다울 수 있음을 증명하고, 기계를 통해 현실을 개혁하고 미래를 개척했다. 독일공작연맹은 그 눈부신 활약에도 불구하고, 1933년 나치의 탄압으로 해체되었다. 한참 뒤, 1946년에서야 재건되어 현대까지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 180p


근대화란, 인간 이성을 바탕으로 한 문명개화를 말한다. / 182p


사회진화론은 세계 각 국가의 사회와 역사가 각 지역 특성에 맞는 형태로 다양하게 발전할 수 있다는 상대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 185p


세기 말 아르누보가 기존의 장식미술인 신고전주의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미술로 나아가는 것이 이상하지 않았듯, 세기 초에 기계미학이 아르누보를 무너뜨리는 것이 이상하지 않았다. / 188p


세상을 분해하는 것은 과학의 방법론이다. 세상을 쪼개서 더 이상 쪼개지지 않는 상태인 원소를 찾아내고, 이것을 조합하여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내는 요소 환원주의, 즉 과학의 기본원리이다. 나무를 쪼개고 재조합해서 품종을 개량하고, 동물의 씨앗을 조합(교배)하여 새로운 종을 만들어 내는 것도 마찬가지다. 같은 방법론을 미술에 적용해서 화면 속 공간을 수직과 수평으로 분해하고 등장하는 인간도 분해해 버리는 것, 이것이 미래의 예술에 맞는 표현 방법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 192p


인간이 쌓은 모든 문명이 헛되게 느껴지니 허무주의가 싹텄다. 모든 것이 허무하니 무정부주의가 등장했다. 무정부주의는 ‘아나키즘 Anarchism’이라고도 부르며, 세상의 모든 제도와 사상과 규범을 부정한다. / 197p


세상과 인간에 대한 인색의 변화는 예술의 변화로도 연결되어서 피안의 세계, 정신 세계를 추구하는 예술이 생겨났다. 이성을 불신하는 다다이즘이나 무의식을 추구하는 초현실주의 등도 이 시기 생겨난 대표적인 미술사조이다. / 197p


미술에서 아방가르드는 과거의 전통을 뒤로 한 채, 새로운 시대를 향해 앞장서서 나아가는 예술가를 지칭한다. / 198p


아방가르드는 제1차 세계대전을 전후한 이탈리아이 미래주의, 프랑스의 입체파, 독일의 표현주의, 다다이즘, 초현실주의, 구성주의 운동과 같은 형태로 이어졌는데, 1940년대 제 1차 세계대전과 함께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 199p


이들을 러시아 구성주의 Constructivism 라 불렀다. 여기서 ‘구성’은 ‘Composition 짜맞춤’이 아니라 ‘Construct 쌓아올림’로 구축주의로 번역하기도 한다. / 209p


구성주의는 최초로 완전한 비구상을 시도했다. 작품에 어떠한 형상도, 감정도 남기지 않았다. 무엇을 보고 따라 그리는 재현의 미술을 거부했다. 보이는 대로 표현하지 않고 과학적인 인식으로 재구성하여 순수한 형태로 환원된 조형 요소, 가령 점, 선, 면을 조합하여 작품을 만들었다. / 각주 : 비구상 : 구상은 대상의 형상이 없는 것, 비구상(반추상)은 구체적인 대상은 있으나 형상이 무너진 것, 추상은 대상의 형상 자체가 없는 것으로 구분할 수 있다. 고전주의는 구상, 후기 인상파나 큐비즘은 비구상(반추상), 다다이즘이나 잭슨 폴록의 애션페인팅 등은 추상이다. / 210p


한편, 제 1차 세계대전 당시 중립국인 네덜란드에는 유럽 각국의 망명 작가들이 줄을 이었고, 새로운 미술운동이 펼쳐졌다. 1917년 테오 반 되스부르흐와 몬드리안을 중심으로 ‘데 스틸 De Stijl’이라는 추상 미술 단체를 결성했다. 데 스틸은 영어로 The style  즉 양식을 의미하는 네덜란드어이고, 우리말로는 신조형주의로 해석된다. / 데 스틸, 즉 신조형주의자들은 4차원의 세계를 살아가는 신비주의자에 가깝다. / 223p


과학적 방법론이란 분해와 조합(재구성)이다. 우선 세상 모든 물질을 최소로 쪼갠다. 더 이상 조개지지 않는 원소는 가장 순수한 상태이며, 무엇이든 될 수 있는 보편적인 바탕이 된다. 이를 새로운 질서로 조합해 새로운 물질을 만든다면, 이는 신이 천지를 창조하는 과정이자 자연의 섭리를 따르는 것이고, 곧 우주의 질서를 세우는 일인 것이다. / 226p


네덜란드에서 데 스틸 운동이 일어난 비슷한 시기에 프랑스에서는 큐비즘이 유행하였다. 큐비즘 역시 세상 만물을 분해해서 재조합하는 과학적 방법론을 순수미술에 적용하고, 빛의 원소인 원색들을 주로 사용했다. / 227p


독일공작연맹에서 활동하던 유럽 각지의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은 1919년 설립된 바우하우스의 창립 멤버가 되었다. 바우하우스는 작은 디자인 대학으로 디자인을 다른 예술 분야로부터 독립싴 독자적인 역할과 방법론을 갖추게 한 기념비적인 학교이다. BAUHAUS에서 ‘바우Bau’는 독일어로 ‘건축’을 뜻하고 ‘하우스Haus’는 ‘집’을 뜻하니, ‘건축학교’ 정도의 의미이다. / 232p


이텐은 개교 초기의 교육을 주도하여 바우하우스의 성격을 규정지은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파울 클레는 바우하우스의 정신적인 지주로 불렸으며, 칸딘스키는 바우하우스가 해산될 때까지 교육의 중추적인 역할을 맡았다. / 238p


칸딘스키의 감정이 강조된 그림을 ‘뜨거운 추상’, 모호이너지의 이성적인 그림을 ‘차가운 추상’이라고 부른다. 전자가 예술가라면 후자는 수학자나 기술자에 가까웠다. 바우하우스의 교육은 그로피우스와 이텐, 칸딘스키와 모호이너지만큼의 폭넓은 스펙트럼을 가지게 되었다. / 246p


결국 1925년 3월, 바이마르 국립 바우하우스가 폐쇄되었다. 여기까지 좌충우돌하던 바우하우스의 실험은 1막을 내린다. 전후 논란과 혁명, 예술가의 이상과 궁핍한 현실, 형이상학적 광기와 과학, 예술과 사업이 뒤섞인 1기 바이마르 바우하우스는 외견상 혼란뿐이었지만, 혼란이 정리되었을 때 비로소 그로피우스가 꿈꾸던 새로운 교육이 시작되었다. / 246p


시각적 사고는 언어 대신 조형, 예컨대 이미지, 도형, 색채 등으로 생각하고 표현하는 방법이다. 1956년 파울 클레가 출간한 조형적 사고 Das bildnerische Denken 가 그 결과물이다. 바우하우스는 20세기 초 크게 유행이었던 ‘게슈탈트 심리학 Gestaltpsychologie’를 조형에 접목하여 형태와 시각 인식의 관계를 체계화하려 노력했다. 게슈탈트 심리학에서는 ‘부분의 합은 단순한 전체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 게슈탈트 심리학은인간이 형상을 어떻게 인식하고 이해하는지에 관해서 연구한다. 그리고 인간의 인지심리학을 이용하여 ‘좋은 형태 Gate Gestalt’를 규정하려 노력했고, 좋은 형태는 유사, 근접, 대칭과 같은 게슈탈트 원리에 따라 구성된다고 믿었다. 좋은 재료가 좋은 음식의 조건이듯, 좋은 형태는 좋은 디자인을 위한 필수적인 연구 과제였다. 과학적인 방법론을 동원하여 보편적으로 좋은 디자인을 규정한 셈이다. / 250p


모호이너지는 글씨를 과학의 재료 내기 기계의 부품으로 인식하고, 어떻게 배치해야 쉽게 읽히는지에 대한 ‘가독성’을 연구하며 인쇄 기술에 부합한 타이포그래피의 가능성을 탐색했다. 허버트 바이어는 타이포그래피가 적용된 포스터 디자인에 탁월했다.  과거의 포스터는 잘 그린 그림에 글씨는 더하는 정도였다. 하지만 허버트 바이어는 마치 기계 부품이 조립되듯, 글씨를 크기별로 분류하고 일련으로 배치하였다. 전통적인 가로쓰기 방식을 벗어나 수직, 수평, 대각선 등 새로운배열을 시도하였다. 건축이나 기계 설계도를 그리듯, 바둑판식의 눈금을 촘촘히 그린 모눈종이 위에 기계 부품처럼 규격에 맞춘 글씨를 재치하는 ‘그리드 Grid’시스템을 적용하여 간결하고 기하학적 형태의 규격화된 서체를 제작하였다. / 252p


이들이 제안하는 인테리어 디자인도 달랐다. 오스카 슐레머는 인간의 신체와 행동을 분류해 기본 단위를 만들고 이를 바탕으로 건축의 단위를 재정립한 표준모델과 규격화된 공간을 제안했다. 르코르뷔지에가 주장한 모듈러와 비슷한 개념으로, 공간의 분자는 모듈이고 모듈을 재조합하면 건축의 기본단위가 된다. 사람과 사람의 행위도 모듈을 구성하는 하나의 분자에 불과하다. / 256p


바우하우스는 유럽 각지에서 몰려든 아방가르드들이 당대의 예술과 사회이념, 미래 유토피아에 대한 전망을 모두 녹여 집대성하였고, 예술에서 디자인을 독립시켰다. 예술과 기술을 통합하고 기능주의 미학을 완성해서, 예술과 산업 사이의 교육적 혼란을 극복하고 새로운 디자인 교육 방법론을 제시했다. / 260p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혼란기에 바우하우스가 사회를 위하여 서민의 주택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면,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풍요로워진 시대의 울름조형대학은 대중과 일상 문화를 디자인의 범주로 끌어들여, 바우하우스의 이념을 자연스럽게 변화, 발전시켰다. / 262p


울름조형대학은 가전제품 회사 브라운 BRAUN, 항공사 루프트한자 등과 산학협력을 진행하여 많은 성공 사례를 남겼다. 울르조형대학의 디자인 방법론을 적용했던 브라운사의 디자인은 기계미학과 인간공학을 결합하여 현대 디자인의 모범이 되었다. / 264p


물론 바우하우스의 성과가 오로지 바우하우스의 구성원들만의 노력으로 이뤄낸 것은 아니다. 윌리엄 모리스의 이상과 러시아 아방가르드의 사상과 활동, 부흐테마스의 조형실험과 교육론, 데 스틸 추상작가의 방법론, 독일공작연맹의 기계 이념과 사회개혁 실천이 한데 어우러진 총합이다. / 265p


비유하자면 유럽과 러시아 예술가들이 농사를 짓고, 바우하우스가 수확하고, 이후 미국이 밥을 지어 여러 사람과 나눠 먹었다고 볼 수 있겠다. / 266p


르네상스 미술이 인간을 발가벗겼듯, 모더니즘 미술과 디자인은 세상만물을 벌거벗은 형, 색, 선으로 환원하고, 비례와 좌표, 수학적 공식으로 조합하는 창작 방식을 선보인 세계 보편적인 조형이자 예술의 본질, 미술의 완성으로 보았다. / 274p


유럽인의 순수에 대한 집착을 우리로서는 이해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유럽의 지긋지긋한 중세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중세에 해당하는 고려는 잊혔고, 조선은 유럽처럼 폭압적이지 않았다. 또 조선은 지나치게 검소하여 조형적으로는 모더니즘이나 미니멀리즘을 이미 구현한 사회에 가까웠지, 장식과는 거리가 멀었다. 동아시아 국가에서 도자기를 조선처럼 순수하게 만드는 국가는 없었다. / 275p


굿 디자인 제도는 대중에게 모더니즘을 진흥한다는 계몽주의적인 취지로 시작되었고, 모더니스트들의 바람대로 일반 대중의 안목을 바꾸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제도화된 ‘굿 디자인’마크나 시상식은 디자인을 서열화해서 생산자와 소비자 모두에게 획일적인 모더니즘 스타일을 좋은 취향, 내지 고급 취향으로 강요하는 폭력성을 발휘한, 다분히 정치적이고 이념적인 활동이기도 했다. / 한편 모더니즘의 반대편에는 모더니스트들이 그토록 싫어하고 배척해 온 ‘전통’이 있다. 모더니스트들은 민중의 생활양식, 전통문화 속에서 자연스레 형성되어 온 향토적인 속성의 물품을 나쁜 것으로 규정하고 소위 키치 kitsch라 부르기 시작했다. / 283p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의 영향 아래 있는 모든 공산국가가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를 예술 생산의 토대로 삼았다. 그러자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추상미술을 냉전 시대의 선전 도구로 활용해, 자유 진영의 대표 양식임을 주장했다. 역사 이래로 예술의 역할은 늘 선전의 도구였으니 새삼 새로울 것도 없다. 다만 고전미술이 신과 계급의 나팔수 역할을 해 온 점을 근대미술이 끊임없이 비판해 왔는데, 이제 근대미술이 자유주의 선전에 동원되다니 아이러니한 일이다. / 288p


모더니즘 디자인은 미국 스타일이고, 초창기 우리의 수출교역국은 미국에 한정되었던 탓에 미국의 스타일을 따르는 것이 당연했다. 이로 인해 우리나라 산업 디자인은 ‘수출에 도움이 되는 스타일’이자, 선진국 스타일, 즉 모더니즘 디자인으로 일관되었다. / 296p


사실 모더니즘은 늘 민중의 삶을 전면에 내세웠지만 정작 민중의 취향에는 관심이 없거나 무시했고, 생산자를 위한 조형, 생산에 편리한 양식을 만들어 내며 사용을 강요해 왔다. 어느새 민중 혹은 대중들은 모더니즘의 밋밋하고 단조로움을 포드 모델 T처럼 지겨워했고, 언제나 변함없이 예쁘고 신기하고 친근한 장식을 좋아했다. / 306p


1930년대 유행한 속도감 있는 스타일링과 리디자인을 ‘상업적 모더니즘’이라 부른다. 모더니즘의 큰 틀은 유지하면서도 특정 이미지를 적극 차용해서 스타일링한 디자인을 말한다. / 307p


오늘날 자동차들이 3년마다 페이스 리프트를 하는 것은 슬론주의 경영방식이다. / 이처럼 멀쩡한 물건을 강제로 못쓰게 만들어 버리는 ‘의도적인 노후화’와 ‘인위적인 폐기’현상이 생겨났다. 물건의 수명이 다한 것이 아니라, 기업이 의도적으로 물건의 수명을 줄여서 고장이 나게 만들거나, 혹은 낡아 보이게 만드는 방식으로 말이다. / 312p


한편 제2차 세계대전을 지나면서 미국에서는 그동안 거의 주목받지 못하던 스칸디나비아 디자인 바람이 불었다. / 313p
자연주의란 자연을 인격체로 대하고 존중하는 태도이다. / 313p


스칸디나비아가 소개하는 인간적이고 감성적인 디자인, 자연주의 디자인을 ‘유기적Organic 모더니즘’이라고 부른다. ‘유기적’이란 생물체처럼 각 부분이 밀접히 연결되어 전체를 이룬다는 말로, 생명체와 같은 느낌의 부드러운 곡선을 강조한 이름이다. / 315p


모더니즘이 철저하게 기능에 충실하고 장식을 저버렸다면, 유기적 모더니즘은 실용적인 목적을 달성하면서도 디자인의 역할을 인간 중심으로 재정의 했다. 북유럽에서 도입된 유기적 모더니즘 디자인은 미국에서 크게 유행했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후 부흥기를 맞이한 유럽인들에게 다시 인기를 얻었다. 유기적 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의 붕괴를 촉진하고 새롭게 등장하는 포스트 모더니즘을 연결하는 가교의 역할을 맡게 된다. 부드러운 곡선이 바우하우스라는 거인과 권위적인 모더니즘을 뛰어 넘었다. / 321p


사람들에게 기쁨과 행복을 주어 정신적으로 고양시키는 예술의 본래적 기능과 예술의 사회적 책임을 저버린 예술가들은 전후 새로운 소비 주체로 등장한 대중을 설득하지 못했다. 대중은 충분한 지식과 소비력을 갖춘 소비자이자, 공화국의 주권자였다. 대중에게 다가가지 않는 예술을 버림받았고, 대신 대중은 대량소비의 시대에 매스미디어가 전하는 대중문화를 즐기고, 대량 생산된 물건을 소비하는 편을 택했다. 성경 대신 만화를 읽고, 미술관 대신 영화관에 가고, 클래식 음악보다 팝 공연을 선호했고, 성모 마리아보다 메릴런 먼로를 더 좋아했다. 더욱이 이러한 취향을 당당하게 드러내었다. / 323p


스스로 권위적인 아카데미즘의 자리에 오른 모더니즘은 변증법이라는 역사 발전의 법칙이자 서구역사의 발전 과정을 따라 전복된다. 미술계에서는 추상미술을 부정하고 넘어서려는 움직임이 생겨나, 대중들의 취향을 저격하는 팝아트 같은 장르가 생겨났다. 이를 모더니즘을 넘어섰다는 의미로 ‘포스트모더니즘’이라 부른다. 포스트 모더니즘의 포스트 Post는 ‘~을 넘어서’라는 의미로, 탈근대주의 정도로 해석할 수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영어표현 그대로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부른다. 포스트모더니즘은 특정한 양식이 아니라, 모더니즘을 부정하는 인식이다. / 324p


앤디워홀의 작품 [캠벨 수프 통조림]은 매우 유명하여 팬시 상품으로도 많이 복제되고, 인테리어 아이템으로도 인기를 끌었다. 앤디 훠홀은 스팸 수준의 저렴한 정크 푸드를 작품 주제로 선택했다. 대량 생산된 작품임을 강조하듯, 대량 생산된 캔을 대량으로 반복해서 인쇄해 놓았다. / 327p


예술에 팝아트가 유행이었다면 디자인에서는 포스트모더니즘 디자인 사조가 붐을 일으켰다. 늘 예술이 앞서고 디자인이 뒤따른다. / 329p


소트사스가 중심이 되어 1981년에 결성된 멤피스 그룹은 또다시 포스트모더니즘의 중심에 섰다. 소트사스와 함께 이탈리아 산업디자인을 이끈 알렉산드로 멘디니 Alessandro Mendini(1931-2019)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전도사 역할을 했다. / 335p


바우하우스의 대표 유산인 그리드 체계는 건축뿐만 아니라 모든 디자인의 시작이자 끝이다. 모든 개별적인 건축물은 관념적인 공간, 즉 그리드 위에서 구현된다. 그리드는 바둑판의 눈금이나 모눈종이의 눈금 같은 것이고, 건축이 들어설 가상의 3차원 공간 속의 수치이다. / 338p


워크맨은 초기에는 모더니즘 스타일이었고 후기로 올수록 포스트모더니즘적 장식을 더했지만, 워크맨의 스타일 변천사를 알아보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1980년대 이후, 더 이상 전체를 아우르는 디자인 이념이나 지배적인 조형의 흐름이 사라졌으며, 대신 시장 트랜드와 기업의 경영 전략에 맞게 세분화된 각자의 스타일을 선보였기 때문이다. / 344p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고 하는데 애플은 인류의 문화유산 격인 기하도형을 독점하여, 디자인의 고유성과 독점, 디자인 보호 제도에 관한 다양한 논의를 촉발했다. / 348p


이제 디자인이라는 분야는 더 이상 예술의 잣대로 해석하기 어렵고, 전체를 아우르는 일반적인 설명도 불가능하다. 더러는 디자인이 예술작품의 지위를 위협하기도 한다. / 349p


오스트리아의 디자인 이론가 빅터 파파넥 Victor Papanek (1927-1998)은 겉보기에만 좋은 디자인과 불필요하게 생산되는 제품을 비판하고, 사회와 환경에 책임을 지는 디자인, 적정 기술의 디자인을 주장하였다. / 349p


혼란스럽지만, 이 모든 것이 디자인이다. 사회, 경제, 문화, 정치에 이르기까지 디자인으로 시작되지 않는 것이 없고, 디자인으로 귀결되지 않는 것도 없다. 21세기는 디자인이라는 스타일의 시대였다고 기록될 것이 분명하다. / 352p


군국주의시대에 접어들어서는 ‘제관양식’이라는 독특한 형태의 건축이 유행했다. 서양식 철근 콘크리트 몸체에 일본식 지붕을 얹은 건축물인데, 황제의 왕관에 빗대어 ‘황제의 왕관 양식’ , ‘제관 양식’이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1930년대 일본의 대표적인 건축 경향으로 자리잡았다. 모더니즘은 아주 짧은 기간 동안만 성행하였고, 대개는 신고전주의 양식이나 제관 양식으로 점철되었다. 한국의 해방 이후, 산업 독재기에 정부 주도로 지어진 많은 건축이 기와지붕을 뒤집어쓰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회화에서는 사실주의와 인상주의가 유행이었다. 조선은 일본을 통하여 서양화를 받아들여 인상주의의 추상적 표현과 사실주의를 동시에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 양식과 이념의 맥락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제대로 된 교육기관도, 교육자도 없었기 때문이다. / 360p


1950년대 미국의 구호품과 문물은 모더니즘 양식을 풍요로움과 등치하는 효과를 낳았고, 모더니즘의 형식이 한국인에게 익숙해지도록 만들었다. 특히 미군 부대와 PX를 통해서 흘러들어온 미국의 대중문화와 상품은 상업적 모더니즘이 한국 디자인의 조형언어로 자리잡게 된 계기가 된다. 국내 처음으로 생산된 국산품들은 마치 미제인 것처럼 만들기 위해 노력했고, 제대로 배운 적이 없는 모더니즘에 꽤 충실했다. / 368p


근대화되지 못한 한국 사회에서 ‘모던데자인’은 후진국에게 주어진 첨단 무기 같은 것이었다. / 369p


해방 이후 미국에 연수를 다녀온 교수 작가들은 모더니즘 전도사가 되었다. 국내에 선진국의 문물인 모더니즘을 제도권 내에 안착시켰으며, 모더니즘 원리주의자처럼 대학에서 평생토록 모더니즘 이론을 가르쳤다. 서구식 건축 및 추상적인 모더니즘은 조형언어의 선善이고, 전통과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은 악惡으로 자리잡았다. 식민지 근대성과 한국적 모더니즘 경향은 특히 1970년대 농촌 새마을 운동을 통해서 극에 달해, 한국 사회 전역에 모더니즘 스타일의 주택과 생활방식이 확산하며 국가적 변화를 일으켰다. / 374p


건축과 달리 산업디자인의 모더니즘 수용 경로는 일본이었다. 1960~1970년대 한국은 일본기업의 생산기지 역할을 하거나, 일본 제품의 카피를 통하여 모더니즘 스타일의 제품 생산방식을 배웠다. / 379p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디자인이 현실을 개선하기 위한 비판적 학문으로 인식된 적이 없었다. 서구를 거울삼아 우리의 현실을 똑바로 들여다볼 여유도 없었다. 서양화는 처음부터 완성된 인상주의로 도입되었고, 디자인과 건축은 서구에 대한 선망이나 개혁의 상징으로 처음부터 네모난 줄만 알았다. / 380p


우리는 20세기 초, 오랜 식민지와 전쟁으로 인해 변화하는 세계와 기계 문명에 대해 고민할 시간을 놓쳤다.  장인이 스스로 장식을 폐기하는 수순을 밟지 않았다. 어느 날 눈떠보니 신고전주의가 있었고, 모더니즘이 있었으며, 포스트모더니즘이 유행하고 있었다. 한국 디자인사에는 저항의 역사가 없다. / 38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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