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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버트 드레이퍼스 · 숀 켈리 [모든 것은 빛난다] 책 리뷰

by ianw 2025. 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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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버트 드레이퍼스 · 숀 켈리 _ 모든 것은 빛난다 _ 사월의책 _ 인문 _ 인문교양]

 

 


당신도 하늘에 있는 빛나는 수많은 별들 중 하나다. 빛은 태어날 때부터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어디를 비출지는 당신의 선택이다. 길을 잘못들어 잠시 빛을 잃을 수도 있겠지만 잘 다듬으면 분명히 더 멀리까지 비출 수 있게 된다. 그건 온전히 우리 자신의 선택이다. 이 책은 선택에 도움이 되는 것들로 가득하다. 방법은 문학과 철학을 통한다. 

 

모든 것은 빛난다 책


우리는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선택의 순간과 마주친다. 그 것은 우리의 정체성과 관련이 있다. 중세시대에는 모든 것을 신의 탓으로 돌릴 수 있었기 때문에 우리의 선택에 대한 이유를 찾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신의 의지가 의심받기 시작한 이후 사람들은 스스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르네상스 시대 이후 인간존재는 우주의 중심에, 즉 모든 신과 신비를 넘어선 곳에 자리하게 되었다. 우리는 그런 변화의 모습을 신성한 질서의 몰락에 집중했던 세익스피어의 작품들과 중세적 가정들에 연연하지 않고 회의적인 질문을 던질 수 있었던 데카르트를 통해 엿볼 수 있다.

 

모든 것은 빛난다 책


소설가 데이비드 포스터 월러스는 46세의 나이로 2008년 목을 매 죽었다. 그는 우리 모두가 살아가면서 겪고는 있지만 직시하지 못하는 현대적 실존의 단면들을 일종의 상실로 설명했다. 끊임없이 창조해야만 하는 예술가에 대한 견해로 구분하자면 반대편에는 엘리자베스 길버트가 있다. 월러스는 우리가 스스로의 의지로 선택하기만 한다면 무엇이든 성스러운 것으로 경험할 수 있다고 보았다. 반면 길버트는 작가란 자신의 천재적 영감을 순수하게 수동적으로 수용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창작의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작가들에게는 길버트의 관점이 위로가 될 수 있다. 작가는 그 중간의 새로운 어떤 지점이 존재할 것이라 믿고 탐색을 다짐한다.

 

탐색의 시작은 호메로스의 작품 ‘오딧세이아’이다. 현대의 관념으로는 호메로스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도덕적 주제에 대한 태도를 이해하기 힘들다. 그 태도란 인간이 아니라 신이 주체가 되는 삶이며, 신과 연결되어 있고, 우리가 통제하지 못하는 일이 우리에게 적절히 이루어졌을 때 감사와 경외의 느낌에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호메로스는 인간 존재를, 자기 실존의 핵심을 통제하기에 불충분한 존재로 규정하고 있으며, 인간 탁월성의 핵심영역이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샤르트르의 실존주의 철학이 바탕이 되는 오늘날의 관념, 즉 우리 자신만이 우리 행동의 유일한 원천이라는 생각을 버리지 않으면 호메로스가 느꼈던 현상들에 접근할 수 없다. 

 

호메로스가 등장한지 수백년이 지난 기원전 5세기 아테네에는 아이스킬로스가 있었다. 아이스킬로스는 그의 작품 ‘오레스테이아’를 통해 호메로스와는 다른 관점을 제시했다. 아이스킬로스는 호메로스의 다신주의가 가졌던 성스러움의 관념에서 벗어나 좀 더 통일적이고 일신주의적인 우주의 개념으로 나아간다. 그의 신들은 행복한 다양성을 벗어나 모든 사람들의 행위에 통일적 기준을 부여했다.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예술작품이 그 시대의 문화와 의례들을 부각시켜주고 구현해 보여주는 패러다임의 역할을 한다고 보았는데, 호메로스의 ‘오딧세이아’와 아이킬로스의 ‘오레스테이아’, 그리고 단테의 ‘신곡’등이 바로 그런 작품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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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곡은 중세 전성기의 정점이자 패러다임을 이루는 작품이다. 단테는 이 작품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용어를 통해 기독교를 명료화하려고 했던 토마스 아퀴나스의 관점을 대중적 언어로 표현하고자 하였다. 재미있는 부분은 호메로스 작품속의 헬레네가 여기에서도 등장하는데, 전혀 다른 위치에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작품에 따르면 신의 사랑 앞에서 의미있는 것들은 아무 것도 남지 않게 된다. 작가는 단테의 이러한 시도를 실패한 것으로 보고 있으며, 이후 등장한 루터가 그리스 철학과 유대-기독교적 경험을 통하려는 시도에 마침표를 찍는다. 이어 데카르트가 나타나 개인을 주체로 보는 오늘날의 이해가 시작되었고, 칸트를 통해 해설되었으며, 샤르트르에 의해 확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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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먼 멜빌은 그의 작품인 모비딕에 대하여 악마적이라고 평가하면서도 동시에 순진무구하다고 표현하였다. 그의 작품에서 고래는 일종의 신비이고 신이며 너무나 많은 의미를 가진 나머지 무의미나 다를 바 없는 신비적 대상이다. 고래와 마찬가지로 이 작품에서 의미를 가지지 않은 요소들은 발견하기 힘든데 그 것은 그 동안 인간이 진리를 향해 걸어온 길의 파편들이며, 그 것들은 어떤 기준에 따라 분류되지 않는다. 마침내 멜빌은 그의 작품속에서 배를 침몰시킴으로서 서양 역사 전체를 침몰시키고,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다양한 의미들을 공평하게 바라볼 수 있도록 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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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스포츠는 재미있게도 종교와 유사한 성스러운 공동체를 쉽게 만날 수 있는 장소이다. 임시적이면서 개인이 상황에 맡겨지고 통제되는 그 순간들은 현대의 우리에게 익숙한 영원하고 지속적인 확실성과는 거리가 멀며 오히려 호메로스 시대의 그리스적 실재개념과 가깝다. 하지만 그 것은 또한 내가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위험한 얼굴도 가지고 있는데, 이러한 위험성을 피하고 길을 찾기 위해 찾아봐야 할 과거의 예 중 하나는 장인의 포에이시스, 즉 창작이다. 현대의 기술은 우리의 삶을 향상시켰지만 무엇이 중요하고 가치있는 것인지 분간하기 힘들게 하기도 했다. 이 것은 세계의 의미를 상실하게 하여 우리 자신에 대한 이해도 단조롭게 만들었다. 우리 스스로 의미있는 차이를 구분하려면 위험과 보상이 함께 따르는 실험과 관찰, 경험하려는 용기가 필요하다. 서양의 숨겨진 역사는 한 가지 형태의 성스러움만이 아니라 상이하고도 양립 불가능한 성스러움의 형태들을 여럿 남겨 놓았다. 우리는 위대한 고전들을 통해 옛 신들과 성스러움을 다시 불러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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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더 넓고 깊은 세계로 우리를 안내한다. 우리는 스스로 알고 있는 것들이 정말 작은 부분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평소에는 인지하지 못한다. 이 책을 통해 만난 것들은 내가 전혀 알지 못하던 부분이고, 인지하지 못했던 영역이다. 나는 작가의 안내를 따라 문장의 층위를 이해하기 위해 여러번에 걸쳐 문장을 탐색했지만 사실 아무 것에도 닿지 못하고 부유하는 느낌이었다. 그 것은 외부를 탐색하다 만난 내 속의 우주였다. 땅에 닿으려 버둥거려도 가벼운 중력은 내 몸을 계속 공중에 머무르게 만들었다.

 

하지만 서양역사를 진보나 상실의 두 가지 경우로 분류하는 전통적이고 합리적인 관점과는 별도로, 무엇인가가 양립하는 형태로 세상을 바라보았던 관점을 벗어나, 또 다른 무엇이 있을 수도 있겠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만으로도 나에겐 의미가 있던 시간이었다. 영원한 이교도로 매몰되지 않기 위해, 이해하기 힘들어도 길은 계속 걸어야 한다. 그래서 이상적인 인간상이나 삶과는 거리가 멀다고 느껴짐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다가올 수많은 반짝거림을 알아차리길, 걸어가는 길에서 빛나는 의미들이 담긴 부분들을 이해할 수 있길, 그래서 그 시간에 충실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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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리고 내가 흰색을 좋아하는 이유에 대해 설명할 그럴듯한 이야기를 발견한 것도 큰 수확이다. 모비딕의 특징 중 하나인 섬뜩하고도 본질적인 흰색에 대한 설명이 그 것인데, 모든 것을 담을 수도 있으며 어쩌면 의미같은 것은 전혀 가지지 않은 것이 특징인 흰색, 실은 눈에 보이는 색깔이 전혀 없는 상태라는 이야기가 그 것이다.

 

 

 



[두번째 글]


우리는 모두 어딘가로, 또는 누군가를 향해 가는 중이다. ‘모든 것은 빛난다’를 읽고, 그 안에서 엘리자베스 길버트라는 작가를 알게 되고, 작가의 영상을 보고, 지금은 그 작가의 다른 책을 읽고 있다. 공교롭게도 제목은 ‘순례자들’이다. 책이라는 것은 참 신기하게도 읽는데서 그치지 않고 새로운 길을 열어주고 모르던 인연들을 이어준다. 우리는 모두, 아마도 순례자들이다.


‘모든 것은 빛난다’를 쓴 작가들의 주장에 의하면 현대의 사람들이 허무함에 흔들리는 것은 신에 의지하지 않고 인간 혼자만의 힘으로 의미를 찾으려 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로 선택할 것과 짊어질 것이 너무 많아진 사람들은 주위를 돌볼 틈도 없이 달려가다 지쳐 쓰러진다. 최근 나는 작업을 하다가 쉽게 지치는 횟수가 많아졌다. 그런 상황에 처한 모습은 무기력과 불안을 동반한다. 나는 그 이유에 대해 여러 생각들을 해 보고 있다. 


작가들은 창작활동을 통해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도 이야기하는데, 재미있는 것은 그 창작활동 안에도 작은 세계가 있고, 그 안에는 또 다른 함정들이 숨어있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런 함정들에 빠지지 않기 위해 외부로부터 원인을 찾아야 한다는 엘리자베스 길버트의 주장은 나에게 어느 정도의 안도감을 주었다. 약속없이 정해지지 않은 시간에 찾아오는, 또는 필요한 상황에도 찾아오지 않는 영감을 과학적이거나 합리적으로 설명히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는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을 때 주로 미술관이나 전시관을 방문한다. 그리고 되도록이면 평소에도 많은 것들을 보고 느끼려고 노력하는 편인데 최근에는 사무실과 공방, 그리고 술집을 오고 가느라 아이디어의 자양분들을 모을 시간들이 줄어든 것을 확인했다. 창조적 성과가 우연에서 발생한다고 해도 이런 상황에서는 생각이 잘 떠오르지 않는 것이 어쩌면 당연하다.


미술관과 박물관에 대한 재미있는 관점이 있어서 소개한다. 문화심리학자 김정운 교수님은 불안해질 때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찾는다고 한다. 이런 장소에 가면 이내 불안한 마음이 가시고 편안해지는데, 그 장소가 불안을 극복한 인류의 이야기로 가득한 곳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덧붙여 불안한 사회일수록 다양한 문화적 경험과 예술적 경험이 탈출구이며, 스마트폰의 허접한 음모론이나 들여다보고 근거 희박한 설명으로 흥분만 하는 사람들이 등장하는 TV채널이나 만지작거리는 방식으로는 존재의 불안을 해소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설득력 있는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책을 읽는 내내 편하지 않았다. 잠시 마음에 닿는 문장에 머무르다 보면 앞의 것들이 날아가버려서 나중에는 뒤죽박죽이 된 경험을 하다가, 그 이후에는 몇 페이지만 읽어도 시간에 관계없이 졸음이 쏟아졌다. 그 것은 이 책의 내용이 내가 이해하기에는 너무 심오하고 깊은 것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을 읽는 동안만은 신은 나에게 관심을 주지 않은 것 같다.


나는 최근들어 다양한 책을 접하고 읽을 수록 신에 대한 믿음이 사라지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이런 현상은 신에 대한 믿음이 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현대의 일신주의적인 종교가 사회에 미치는 부정적인 모습과 영향에 대한 불신과 거부감 이었던 것 같다. 상대적으로 다양성과 개별성 그리고 관용주의를 인정하는 다신주의가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그저 또 다른 세계를, 낯선 관점을 만났다는 자체로 의미가 있었던 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책을 다 읽고 난 후 긍정적인 생각이 들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오늘이 아무 사건도 일어나지 않은 평범한 기적같은 날이라 다행이다. 우선 당분간은 어디로든 걷고 있는 내 모습에 만족하려 한다. 다만 작가의 말처럼, 무서워하지 말고, 위압당하지 말고,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우리 몫의 일을 해 나갈 수 있기를.


우리는 모두 어딘가로, 또는 누군가를 향해 가는 중이다. 그리고, 나는 그 무리들 중 가장 불평많은 순례자다.


 

 


[문장수집]


현대 세계에서 우리는 더 깊고 어려운 문제와 마주하고 있다. 올바른 행동 과정을 알고 있지만 그것을 추구하지 못한다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다. 그보다는 무엇을 좋은 삶을 위한 첫 번째 기준으로 잡아야 하는지에 대해 아무런 판단력도 없다는 것이 문제이다.

우리가 누구인가라는 깊은 질문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우리 문화의 무능력, 우리 문화의 어떤 단면들에게서 비롯된 정조라는 것이다.

이런 배타적인 믿음을 고집하는 광신적인 하위 종교문화흔 오늘날에도 여전히 남아있을 것이다.

글쓰기는 언제나 인생의 번역하는 나의 특수한 방법이었습니다. 스쳐가는 것으로부터 경험을 찾아내고 그것을 소화시켜 현실로 만드는 나만의 방법이었습니다.  엘리자베스 길버트

어두운 시대에서 좋은 예술에 대한 정의는, 시대의 어둠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살아 있고 빛을 내는 인간적이고 마법적인 요소들에 대해 심폐소생술을 가해주는 그런 예술일 겁니다. -중략- 정말로 좋은 소설이란 이런 세계를 묘사하면서도 그 속에 살아있는 인간 존재를 위한 가능성에 빛을 비춰주는 소설일 겁니다.  데이비드 포스터 월러스

인간들은 누구나 신들을 필요로 하니까요. 오디세이아 중에서 페이시스트라토스

문화에는 언제나 새로운 이해를 파괴하거나 그것을 현행질서에 동화시키는 보수적인 힘들이 강력하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양역사의 특정 시기를 대표하는 위대한 작품들을 읽음으로써 우리의 문제와 동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시대들에서도 무엇인가를 찾아낼 수 있다. 이 것들은 결국 우리의 문제로 수렴될 것이다.

행복은 결코 지성아니 상상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내와 심장, 침대, 식탁, 안장, 난롯가 그리고 전원 등에 있는 것이다.

신성한 진리란 언제나 변화할 수 밖에 없는 것이며, 결코 완성될 수 없는 것이다. 불완전하고 종결되지 않기 때문에 신적이고 참된 것이다. 불완전성 때문에 그것들은 신성하고 참된 것이다.

 

 

 

 


의미의 부재를 참는 것과 그 부재를 받아들이는 것은 다른 일이다. 인간이라면 어쨌건 자신을 다른 인간과 구분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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