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가 사랑한 수식_ 오가와 요코 _ 김난주 옮김 _ 현대문학 _ 소설 _ 일본소설]
뭔가 낭만적인 제목의 책이다. ‘박사가 사랑한 수식’. 가사도우미로 일하는 주인공이 한 까다로운 박사의 집을 돌보게 된다. 박사는 교통사고로 인해 80분밖에 기억하지 못하는 장애를 가지고 있다. 유일하게 박사가 하는 일은 수학문제를 푸는 일. 주인공과 주인공의 아들 루트, 그리고 박사의 수학을 통한 우정이 잔잔하게 그려진다. 뭔가 어울리지 않는 세 사람의 우정.
부지런하고 꼼꼼한, 그러니까 자기가 쓰려고 하는 분야에 대해 많은 공부를 한 작가의 소설은 확실히 현장감이 있다. 특히 그 주제가 과학이나 수학처럼 우리가 어려워하는(나만 어려워하는 것일 수 있다) 분야와 관련되어 있는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수학에는 원래부터 관심도 소질도 없었던 나에겐 더욱 그랬다. 뭔가 지적 허영심을 만족시켜주는 느낌이랄까. 시간의 밀도가 높아졌다.
또한 나이를 뛰어넘는 순수한 우정에 관한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감동적이다. 어른다운 어른을 만나는 것도 그렇다. 둘 다 그만큼 귀하기 때문일 것이다.
요즘엔 일본작가들의 책에 손이 많이 간다. 모든 일본문학이 그런 건 아니지만, 몇몇 작품에서 발견할 수 있었던, 문장을 천천히 읽게 만드는 정서가 마음에 든다. 노골적이지 않은 것도 마음에 든다. 뭔가 격과 기품이 있다 랄까. 내가 쓰는 글에도 그런 차분함을 담고 싶지만 그건 쉽지 않은 일이다. 문장에는 자연스레 쓴 사람이 묻어나기 때문이다.
작품에 도움을 주었던 수학자 후지와라 마사히코는 이렇게 말했다. “오가와 씨는 이 작품에서 수학과 문학을 결혼시켰다.”라고. 최근 유행하는 융합이다. 바람직한 융합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우리는 소설을 읽으며 소설 속의 주인공이 길을 잃으면 같이 불안해하고, 주인공이 길을 찾으면 안도한다. 그리고 그 안도는 현실을 떠나 소설의 세계로 여행을 떠났던 우리를 다시 현실로 돌려보낸다. 주인공의 안도를 우리의 안도와 맞바꾸어서.
만약 내가 조금 더 어렸을 때 이 책을 읽었다면 수학을 좋아할지도 몰랐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학을 싫어하는 아이에게 읽혀보면 어떨까 싶다. 또는 어른을 대하기 힘들어하는 아이에게도.
[문장수집]
우리는 10만 자리나 되는 거대한 소수와 수학의 증명에 사용된 가장 큰 수로 기네스북에 올라 있는 수, 또 무한을 넘어서는 수학적 관념에 대해서도 배웠지만, 그런 것들을 아무리 많이 동원해도 박사와 함께 지낸 시간의 밀도에는 미치지 못한다. / 6p
자 보라고, 이 멋진 일련의 수를 말이야. 220의 약수의 합은 284, 284의 약수의 합은 220. 바로 우애수야. 쉬 존재하지 않는 한 쌍이지. 페르마도 데카르트도 겨우 한 쌍씩밖에 발견하지 못했어. 신의 주선으로 맺어진 숫자지. 아름답지 않은가? / 31p
숫자는 인간이 출현하기 이전부터, 아니 이 세상이 출현하기 전부터 이미 존재하고 있었어.-인간이 제 손으로 발명한 것이라면, 누가 그 고생을 하겠나. 수학자도 필요가 없지. 숫자의 탄생을 지켜본 사람은 아무도 없어. 알았을 때 이미 거기에 있었을 뿐이지. / 37p
서재에서는 빗소리가 잘 들렸다. 마치 그곳만 하늘에 닿아 있는 것 같았다. / 56p
무참하게 짓밟혀 발자국이 어지러운 사막에 한 줄기 바람이 불면서, 눈앞에 똑바른 길 하나가 나타났다. 길 앞에서 반짝이는 빛이 나를 인도했다. 그 속에 발을 내디디고 한껏 몸을 적시고 싶은 빛이었다. 깨달음이라는 이름의 축복이 내게 쏟아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 80p
우리만 입 다물고 가만히 있으면 박사는 자신이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알 수 없으니, 잃어버리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 89p
모양은 모두 제각각 이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멋이 있었다. 박사가 태어나 처음 숫자를 만난 이후 애지중지 키워온 우호의 정이 각각의 모양에 반영돼 있었다. / 91p
박사의 수업을 들으며 한 가지 의아한 것은 그가 모른다, 알 수 없다는 말을 아무 거리낌 없이 사용한다는 점이다. 모른다는 것은 수치가 아니라, 새로운 진리를 위한 길잡이였다. 그에게 아직 아무도 손대지 않은 예상에 담긴 사실을 가르치는 것은 이미 증명된 정리를 가르치는 것만큼이나 중요했다. / 92p
신은 존재한다. 왜냐하면 수학에 모순이 없으니까. 그리고 악마도 존재한다. 왜냐하면 그것을 증명할 수 없으니까. / 144p
그렇지. 그게 직선이야. 자네는 직선의 정의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군. 그러나 다시 한 번 생각해보라고. 자네가 그은 직선에는 시작과 끝이 있어. 그렇다면 두 개의 점을 최단거리로 이은 선분인 셈이지. 원래 직선의 정의에는 끝이 없어. 한없이 뻗어 나가는 선이지. 하지만 한 장의 종이에 그리기에는 한계가 있고, 자네의 체력에도 한계가 있으니까, 일단 선분을 직선이라고 이해하고 있는 거야. 그리고 아무리 날카로운 칼로 꼼꼼하게 끝을 갈아도, 연필심에는 굵기가 있어. 따라서 여기 있는 직선에는 너비가 있지. 즉, 넓이가 생기는 거야. 그러니까 결과적으로 종이에 진정한 의미의 직선을 그리기란 불가능하다는 얘기야 / 물질이나 자연현상, 또는 감정에 좌지우지되지 않는 영원한 진실은 눈에 보이지 않는 법이야. / 166p
텅 비었다는 것은, 즉 0을 뜻하는 것인가? / 그러니까 지금 자네 안에는 0이 존재하는 샘이로군. / 201p
박사의 행복은 계산의 어려움에 비례하지 않는다. 아무리 단순한 계산이라도, 그 정확함을 함께할 수 있어야 우리의 기쁨도 배가된다. 26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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